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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오늘의 성찰'] 죽음의 바른 이해

 

만약 삶이 행복이라면 삶의 필연적 조건인 죽음도 역시 행복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은 자아로서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대부분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평화와 안도의 표정은 아마 거기서 유래하는 것이리라. 선한 사람의 죽음은 대개 조용하고 평온하다. 그러나 각오를 하고 죽는 것, 스스로 나아가 기꺼이 죽는 것은 자기를 버린 자, 살려는 의지를 거부하며 그것을 포기한 자의 특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만이 겉으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죽기를 원하는 자이며, 따라서 자아의 존속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만약 죽음이 두렵다면 그 원인은 죽음 속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있다. 선량한 사람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이 적다. 


성자에게는 이미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의 죽음은 육체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을 멸망시킨다. 즉 순간적인 생명의 의식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매일 잠들 때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문제는 과연 육체의 죽음은, 나의 모든 의식의 흐름을 통일하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세계에 대한 나의 특별한 관계를 무너뜨리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려면 그 전에 나의 모든 의식을 통일하고 있는 것, 나의 세계에 대한 특별한 관계가 내 육체적 생존과 함께 태어나고, 따라서 그것과 함께 죽는 것임을 먼저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늙기 전에는 나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늙은 뒤부터 나는 선하게 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선하게 죽는다는 것은 곧 기쁜 마음으로 죽는 것이다. (세네카)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네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신의 자아 속에 갇혀 있는 운명이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라.

 

  만물은 다 그 속에 생명의 숨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근본이요, 인생 역사의 근본입니다. 우리 속에는 다 그 생명의 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방해하지 말고 기르란 말입니다. 도끼로 나무통을 찍어 넘긴 것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무꾼이 낫으로 벤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말과 소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뜯고 뜯으면 아무리 하늘이 준 자연의 힘이기로서니 어찌 견디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한없이 약한 듯하면서도 한없이 강하고 질긴 생명의 소생하는 작용은 언제 되느냐 하면 밤 동안에 됩니다. 낮은 일이 주장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소모되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낮이 좋은 줄만 알고 밤이 어떻게 필요한 것은 모르는 일이 많지만 사실 이 천지에 낮만 있고 밤이 없었다면 생명은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씨ᄋᆞᆯ이 아구를 트는 것은 밤입니다. 상처가 아무는 것도 밤입니다. 밤은 쉬는 때입니다. 쉬는 때가 사는 때입니다. 숨을 쉰다. 숨 태운다는 말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아마, 안식(安息) 사상의 근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겠느냐 죽이겠느냐 하고 반문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달/밤이 기준이다. 옮긴이 주)


  생물적 생명에서도 그렇지만 도덕적ㆍ정신적 생명에서는 더합니다. 밤은 고요하고 쉬는 시간입니다. 이 고요하고 쉬는 동안에 상했던 생명력이 도로 살아납니다. 그래서 맹자는 이 밤숨마저 끊어지면 짐승이 되어버린다 한 것입니다. (함석헌)/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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