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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봉락 인천시의원 “슬럼화되고 있는 미추홀구 제재 완화할 것”

36년 정치생활…지구당 청년부장에서 차근차근 단계밟아
“경인고속도로와 경인전철 미추홀구 삼등분해, 반드시 해결해야“
“보육·복지쪽에 관심많아 20~30년 내다보는 정치해야“

 

“미추홀구는 고도제한으로 인해 개발도 쉽지 않고 주민들이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규제완화와 원도심 발전이 이번 임기 목표.”

 

이봉락(국힘·미추홀3) 제1부의장은 1970년 인천에 터를 잡았다. 대구 남산초등학교, 청구중학교, 영남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집안 사업이 실패해 야반도주하다시피 인천으로 올라왔다.

 

인천에 오기 전 그의 집은 집이 꽤 잘 살았다. 당시만 해도 이 부의장은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집안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지자 좌절감이 크게 들었다. 그는 그 당시 송도 앞바다 홍륜사에 가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인천을 선택한 이유는 옹진군에 사는 친척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군생활을 마친 뒤 인천공업전문학교(현 인천대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도 여러개 땄다.

 

롯데제과 기술부에서 근무하면서 집안형편이 차츰 좋아졌다. 그 후 일을 그만두고 신라제과점을 운영했는데 수완이 좋아 본점이 3개까지 늘어났다. 그의 아내는 신포동 고려삼계탕을 운영했다.

 

그러다 이 부의장은 제과점이나 음식점이 아닌 사회생활이 하고 싶었다. 그가 생각한 사회생활은 정치였다.

 

1986년 민주정의당 용현3동 청년회장이 그의 정치 인생 첫발이었다. 그러다 남구가 갑을으로 분구되면서 남구을 자리에 이강희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그는 이강희 의원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이 부의장은 지구당에서 청년부장으로 일했다. 청년부장, 조직부장, 15대 국회 입법정책사무관까지 천천히 단계를 밟았다.

 

그러다 이강희 의원이 다음 총선 때 낙선하면서 구의원을 출마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 생활도 해보고 국회 활동도 해보니 지역주민들과 소통하는 데엔 구의원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5대 미추홀구의외 의원으로 당선됐다. 보좌관이나 일을 하면서 관계가 촘촘하게 많아지니 주민들의 반응이 좋았고 당을 바꿔도 구의원하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그가 당을 바꾼 이유는 이강희 의원이 당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장의 당을 따라가는 것이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부의장은 미추홀구의 가장 큰 문제는 경인고속도로와 경인전철이라고 했다. 이들 때문에 미추홀구가 삼등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5년 전부터 경인고속도로 일반도로화를 추진했었다”며 “지난 4년 동안 추진된 사항이 아무것도 없다. 이번 시정부와 의회가 협치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봉공원 인근 수봉지구 같은 경우도 고도제한 설정이 40년 전이다”며 “현재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고도제한을 풀어야 한다. 용역 등을 통해 고도제한이 꼭 필요한 곳엔 강하게 규제를 하되 아닌 곳은 과감히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외에도 보육과 복지 관련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그동안 어린이집·유치원 교사들과 학부모들과 인적관계도 돈독히 쌓아놨다.

 

보육과 관련해선 이주민 자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며느리가 중국인인데 느껴지는 차별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 부의장은 “현재 정치는 너무 앞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며 “20~30년을 바라보면서 외적성장과 내적성장을 같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인천 = 박소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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