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 소설, 공연, 미술 등의 모든 장르의 작품엔 제목이 붙는 게 상식이다.
관람객은 대부분 타이틀을 보고 작품을 이해하고 나름의 정리를 한다.
하지만 제목에 연연하다보면 자칫 작품의 세계를 미뤄 짐작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과천에 제목 없는 비구상 한국화 40여점이 전시돼 가뜩이나 난해한 추상화를 앞에 둔 관람객들이 갖가지 상상의 날개를 펴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비구상과 구상, 반추상화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미술계의 거두로 우뚝 선 향토작가 문암(門岩) 박득순 화백의 서른 여덟 번째 개인전이 시민회관 전시홀에서 지난 25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전체 전시품 중 2∼3개를 제외한 작품들이 첫 세상 밖 나들이를 한 만큼 미술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지와 먹, 물감 등의 재료를 사용해 그린 그림은 온통 채색된 풍경화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가만히 숨죽이고 들여다보면 볼수록 오묘한 맛이 우러나온다.
작품 전체의 구도는 인간의 내면과 제각각인 마음, 인류의 발자취를 담았다.
일반 관람객은 그림 밑에 제목이 없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뜻 와 닿진 않으나 한지와 지극히 단순한 색채만으로 복잡한 인간내면을 그려낸 작가정신을 엿본다.
어떤 작품은 한지가 마치 한아름 꽃을 연상시키듯 아름다운 형상을 띄고 있으나 인간과 인간간의 복잡한 관계와 갈등을 표출해내고 있다.
또 조명을 받은 한지에서 자연스런 그림자가 만들어져 동서양화법에서 쓰이는 음영기법을 대신하고 있다.
“타 예술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미술품은 각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느끼면 됩니다. 굳이 제목을 달아 그 시각을 좁힐 필요는 없지요”
부제조차 없는 그림에 대해 자세한 부연설명도 마다하는 배경을 화백은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해버린다.
유일하게 그림을 보고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반추상화인 배와 닻을 그린 작품은 사회원인 모든 인간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이 잘 나타내 대한민국 미술대전 우수작을 받기도 했다.
“사물을 보고 그대로 그리다보면 한계에 도달해 또 다른 무엇을 찾게됩니다. 또 다른 그 세계가 바로 추상화입니다. 미술계가 발전하려면 비구상을 구현하는 화가가 많이 배출돼야 하고 시민들도 그런 작품세계에 빠져들 줄 알아야 합니다”
문암은 국전에 14번 입상을 한 경력이 말해주듯 중견화가로 이름이 나 있으나 중앙이 아닌 지방전시회만을 고집, 향토작가의 길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