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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물방울은 다른 물방울이 돼 만난다

84.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 김오안, 브리지트 부이오

 

대체적인 사람들, 평균적인 사람들은 ‘미술이요?’하면 ‘아휴, 잘 몰라요’라고 할 것이다. 그건 누군가가 앞에 나타나 쇼스타코비치나 말러의 음악 어쩌고저쩌고할 때 사람들이 가능한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것과 같은 분위기다.

 

그럼 ‘김창열 화백은요?’하면 뭘 그리신 분이냐고 질문이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 ‘물방울을 그렸지요’하면 ‘아 그 줄곧 물방울만 그리신 분!’이라 할 것이다. 맞다. 1971년부터 2021년 타계하는 날까지 줄기차게 물방울만 그렸던 김창열은 우리가 미술과 예술에 대해서 알 듯 모를 듯하는 만큼, 알 듯 모를 듯하는 물방울 작가이다.

 

그에 대한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역시 김창열에 대해서, 미술과 예술에 대해서, 인생과 세상에 대해 알 듯 모를 듯 오묘하고 그래서 기이하게도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젊은 사유의 언어가 가득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흔히들 ‘시네 에세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공식 장르는 아니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엄밀하게 얘기하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스토리 구성이 인위적으로 착착 이뤄진 이 작품을 만든 감독 김오안은 사진작가이자 화가이고 재즈 아티스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김창열의 아들이다.

 

작품엔 그의 탄탄한 사유의 흐름이 담겨 있다. 기이하고 신비스러우며 미스터리스러운 면도 있는데 그건 다분히 이 영화가 영상과 이미지보다(감독은 그렇다고 주장하겠으나) 언어와 문장이 앞서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김오안의, 그의 아버지 김창열에 대한 얘기이고 구술과 대화로 만들어졌을 법한 부자 자서전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책으로도 충분히 나올 가치가 있고 그래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영화를 문장으로서 사유하게 하는데, 만약 이 작품을 책과 글로 보고 있으면 이번엔 반대로 이미지와 물방울 그림들이 연속해서 떠오르는 형국이 될 것이다.

 

이런 느낌, 이런 장르의 작품을 뭐라 불러야 할까. 시각화의 문체화? 다큐의 문학화? 문학의 영화화? 다큐 전편이 불어로 구성돼 있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2022년에 만나는 누벨바그 형 프랑스 영화 같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는 앞뒤 맥락을 같은 의미로 이어 놓는, 양괄식으로 돼 있다. 거기엔 마치 질문과 같은 종지부 문장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감독 김오안은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자신과 자신의 형에게 침대 머리맡에서 돼지 삼 형제 얘기를 해줄 때, (놀랍고 두렵게도)달마 대사 얘기를 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달마대사가 말이다. 9년간 벽을 보고 참선을 했대. 면벽수도라고 해. 졸음을 쫓으려고 눈꺼풀을 칼로 잘라내면서까지 수도를 했대. 그리고 결국 9년 후에 진리를 깨달았단다.’

 

아들 김오안의 다큐 초반은 김창열이 어린 두 형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였다며, 불길한 시작을 보인다. 이건 아버지 김창열에 대한 트라우마를 기록한 작품인가. 위인과 거장, 위대한 작가의 아들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프로이트나 칼 구스타브 융 방식의 분석이 들어간 작품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말미에는 그 모든 것이 그렇지 않다는 종지부의 문장이 두 개 찍힌다. “바로 이것이 부질없이 복잡한 나의 삶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프닝 때 했던 문장의 반복. “이것이 나의 아버지이다.”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을 많이 봐 온 사람들에게도 이 다큐는 꽤 색다름의 미학적 울림을 준다. 김오안은 그걸 이렇게 표현한다. 두 개의 물방울이 있는데 그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닮은 물방울은 하나도 없다. 김오안의 속삭임과 그의 카메라는 수도 없이 다른 표현의 물방울에 대해 얘기하고 그걸 그린 김창열의 그림을 보여 준다.

 

추상적인 물방울도 있고 표현주의적 물방울도 있다는 식으로 물방울의 다양성이 이어진다. 물방울 안에 물방울, 물방울 밖의 물방울, 쓸려가고 밀려오는 물방울,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는 물방울 등등 물방울 하나나 두 개를 그리는 것은 구상이지만, 100개나 1000개를 그리면 계획이 되고, 만 개와 10만 개를 그리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며 엄청난 야심이 되기도 하고 신비와 광기가 되기도 한다는 얘기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 하나하나가 얼마나 개체적이고 또 얼마나 전체적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작품이 자신의 고민에서 시작돼 어떻게 세상과 연결돼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 고민과도 결국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의 파장이 이어지게 만든다. 보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스며들게 한다. 각각의 물방울마다 담긴 비명과 울림, 침묵의 극한,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꽤 노자 철학적이다. 노자는 김창열이 물방울을 그리기 위해 9년, 아니 평생을 벽을 보며 얻고자 했던 사유의 기반이다. 결국 부질없이 복잡해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을지언정 김창열은 궁극적으로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고, 또 드러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위업이다. 아들의 다큐는 아버지의 생애와 작품이 갖는 위대함을 따라가며 애썼고 그런 부분에서 성공적이다.

 

예컨대 물방울의 이미지가 쏟아지는 빗물,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꽃송이, 기와에 점점이 박히는 빗방울 등에서 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김오안의 카메라가 중간중간 그 같은 이미지를 정성스럽게 담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김창열의 쏟아지는 물방울 작품은 2차 대전 때 노르망디에 쏟아져 내렸던 낙하산 부대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김창열의 작품 속에는 전쟁과 죽음, 이데올로기의 갈등, 그 어두운 역사의 내면이 숨겨져 있다.

 

이 다큐는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이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꽤 드라마틱하다. 김창열처럼 김오안 역시 다큐란 물방울 하나를 시작한 데뷔 감독이 됐다. 김오안의 이번 시네 에세이는 김창열의 또 다른 물방울이다. 물방울이 물방울이 돼서 만났다. 그 가계(家系)의 이어짐이 감탄스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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