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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당신은 지금 최악의 인간으로 살고 있습니까?

85.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 요아킴 트리에

 

아무리 미장센이 뛰어나고, 배우들 연기가 훌륭한들, 거기다 뭐 연출까지 감각적이네 어쩌네 해도 사랑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 봐야 남녀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윽고 눈과 마음에 불꽃이 튀어 서로의 몸을 이리저리 비벼 대고, 같이 자고, 그러다 같이 살게 되는 뻔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지지고 볶는 싸움과 눈물이 반복되고, 그러다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등등을 반복하는 이야기가 바로 러브 스토리 영화들이다.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에는 별다른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다. 사랑이 아름답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렇게 주입된, 관념과 허상에 불과하다. 현실은 다르다. 그래서 이 노르웨이산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한국어 제목을 아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된다.

 

영어 제목, 노르웨이어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 Verdensverstemenneske’이다. 그냥 ‘최악의 인간’이다. 별 볼 일 없는 사랑 이야기쯤에 불과할 것 같은데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LA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로튼토마토 지수 96%에다 미국 개봉 당시 최고 오프닝 수익을 올린 영화이기도 하다. 뭐가 있긴 있다는 얘기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12장의 단막으로 구성돼 있다. 그렇게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그건 마치 이 영화의 스토리 구조가 아주 탄탄하게 만들어져 있음을 자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무엇보다 문학적 서사가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20대 중반에서 30살로 이어지는 여자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의 성장사를 그려 나간다. 사랑 이야기인 척 하지만 사실은 한 여인의 자아를 찾아 가는 과정, 그것을 수립해 가는 과정을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듯 차곡차곡 보여 준다. 그 이야기 구조가 비교적 빈틈이 없고, 현실적이며,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슬프게 구성돼 있다. 사랑 이야기는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이야기의 흡입력이 뛰어나야 하는 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그 점에서 점수의 수위를 높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율리에는 의대생이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마치 인간의 몸을 갖고 일하는 목수 같은 느낌이 든다며)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그 역시 사진을 공부한다며 중간에 때려치운다. 그러다 웹툰 작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무려 20살 연상의 남자이다. 당연히 이런저런 울고 짜고 하는 이야기들이 진행돼야겠지만, 이 영화가 좋은 건 그런 부분을 많이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율리에가 악셀을 떠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계속해서 자기 내부에 텅 빈 무엇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이다. 다른 이유들은 부차적이다. 예컨대 악셀은 아기를 낳기를 원하지만 율리에는 애를 갖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건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일 수 있다. 아버지는 어릴 때 그녀를 버린 것으로 보이며,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딸의 생일조차 챙기지 않는다) 생긴 갈등 같은 것이 증폭된 결과는 아니다. 그냥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자신을 잘 모르겠어서이다. 젊은 나이에 걸맞은 관념 덩어리가 그녀의 애정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 다 부질없어 보이는데 그건 영화 속 악셀에게도 율리에가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제5장 ‘배드 타이밍’에서 내레이션으로 언급되듯이 남녀 간의 사랑 혹은 남자끼리, 여자끼리의 사랑이든 뭐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인생의 다른 시기에 만났기 때문이고, 결국 서로가 원하는 것, 원하는 미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걸 맞춘다고 맞추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래서 결국 시간이 흐르면 열기가 식고 대화가 줄며 각자 다른 꿈을 꾸게 되고 한 지붕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최소한 등을 돌리고 잔다. 결혼한 부부가 이혼을 하지 않았든, 오래된 연인이 동거를 계속하며 사실혼 관계를 이어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랑은 이미 죽은 것이다. 사랑의 동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의 운명은 늘 실패하는 것이다.

 

율리에가 악셀의 집에서 뛰쳐나온 것이 에이빈드(헤르베르트 노르드룸)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인지 아니면 만난 후인지는 그래서 중요하지가 않다.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만나 아주 잠시나마 다시, 세상의 시간이 온통 정지돼 있는 듯한 황홀경에 빠진다. 둘은 각자의 파트너가 있는 상태에서 만났다. 그것도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파티에서.

 

율리에는 악셀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며 살고 있는 중이었고, 에이빈드 역시 나중에 알고 보니 환경 액티비스트이자 요가 선생인 수니바(마리아 그라지오 디 메오)와 살고 있던 참이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는데, 서로 바람은 피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두고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서로를 이빨로 무는 것은 바람의 행동인가. 에이빈드가 율리에를 물고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물며 둘은 키득댄다. 서로의 냄새를 맡는 것은 바람의 행동인가. 둘은 서로가 서로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으며 낄낄댄다. 재미있어한다. 거기까지는 바람피우는 게 아니고, 자신들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며 아침에 헤어지지만 누가 봐도 율리에와 에이빈드의 마음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은 바람이며, 늘 변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암수의 동물적 욕구이자 사랑의 본질일 수 있다.

 

자아를 찾는 것이 먼저인가 사랑을 이루는 것이 먼저인가.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며 멀리 환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딛고 서있는 땅 위에 있다는 것이다.

 

율리에가 사랑하는 것은 악셀이나 에이빈드가 아니다. 율리에가 사랑하는 것은 율리에 자신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이야기, 총 12장의 이야기가 귀결되는 부분이다. 사랑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그러지 못하는 자는 결국 뜨거운 사랑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은 실패가 숙명이다. 다만 뜨겁고 달콤한 것을 단 한 번이라도 취해 봤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사람들이 늘 목말라하는 것은 그냥 사랑이 아니다.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사람들이 줄곧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을 마련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눈에 띄고 가슴에 남을 작품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기술은 무엇인가. 그건 에리히 프롬 같은 오랜 철학자조차 궁금해하고 회의했던 부분이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프롬이 가르치려 했던 것은 사랑의 기술이 아니다. 그의 저서의 원제는 ‘The Art of Loving’, 곧 사랑하기의 기술이다. 사랑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얘기이다. 율리에처럼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주야장천 고민해 봐야 그 기술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율리에가 그런 오류를 숱하게 저지르는 것은 젊고 어리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나이에는 늘 그렇게, 사랑하기보다는 사랑의 본질부터 찾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건 누구나가 다 그렇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만든 이 로맨스 영화가 닿으려고 하는 부분은 거기에 있다. 주연 여배우 레나테 레인스베는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적 화두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연기를 펼친다. 러브 스토리 영화는 스토리가 탄탄해야 하지만 인물(=배우)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레나테 레인스베의 매력은 영화 속에서 차고 넘친다.

 

당신은 지금 최악의 시기를 겪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가.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지만 사랑이 지나고 나면 누구나 최선의 사람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후회만 남게 되겠지만 사람들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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