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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칼럼] 어떤 사모곡

 

1.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어린 나이라도 자잘한 추억들이 남아 있을 법하다. 그런데도 몇 가지 파편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속에 남아있는 게 없다.

 

그중 하나. D시 달성동 329번지, 한옥 집 대청마루. 어느 봄날의 오전이었을 게다. 동쪽으로 네모난 창에서 비쳐든 햇살이 마루 저쪽까지 길쭉하니 하얀색 꼬리를 빼물고 있었으니. 양철 바케스 안에서 자라 서너 마리가 숨을 들이마시느라 뻐끔대며 물 위로 코를 내밀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참동안 아팠다가 회복된 나를 위해 자라를 잡았던 모양이다. 어여 마셔라, 크고 하얀 사기 대접에 넘치는 생피의 비릿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그걸 다 마셨다. 그렇게 해야 어머니가 좋아할 것을 아니까.

 

가톨릭계 사립인 H초등학교 입학 추첨에서 떨어진 날도 기억이 난다. 바람이 무척 매서운 날이었다. 추위를 피해 성당 건물 한 켠 양지바른 곳에서 손을 잡고 기다리다가 잘못된 ‘은행알’ 골랐다는 최종 발표에 그만 울어버렸다.

 

그리고 입학한 동네 근처 S초등학교 입학식 날. 왼쪽 가슴에 핀을 꽃아 늘어 맨 손수건이 조금 비뚤어졌던가 보다. 어머니는 군청색 한복 두루마기 자락을 옆으로 젖히더니 무릎 꿇고 앉아 내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조용히 웃으며 손수건을 고쳐 매주고는 자꾸자꾸 머리를 쓰다듬었다.

 

2.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우리 집은 사업이 잘 나갔다. 한 때는 논산훈련소의 3개 연대에 부식을 모두 제공할 정도로 납품사업 규모가 컸다 한다. 누이들은 회상한다. 그렇게 집안을 일으킨 것은 어머니였다고. 사업이 기울어지고 정처 없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기점이었다. 아내의 부재가 주는 정신적, 사업적 타격을 극복하고 일어설 방도가 아버지에게는 없었던 게다.

 

어머니는 다정하고 눈물이 많았다. 한겨울 깡통 두들기는 거지를 기다리게 했다가 굳이 뜨거운 밥을 주곤 했다. 손위 외삼촌과 배다른 손아래 외삼촌 3남매였는데 친정 조카들에게 그렇게 극진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외갓집 사촌들이 나에게 참 잘해주었다. 약국 하는 큰 형, 건설회사 다니던 둘째 형은 물론이었다.

 

셋째 형이 의사였는데, 사춘기 시절 우리 집이 형편무인지경이 되었을 때 나를 만나면 (당시로는 거금인) 2, 3만 원씩을 용돈으로 주고는 했다. 갓 전문의 딴 상황에서 형에게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을 텐데. 그저 고맙다는 생각뿐이었지 왜 이리 잘해줄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그 마음이 짐작이 되었다.

 

D시는 유도가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 도쿄 강도관에서 배운 사범들이 해방 이후 깊고 넓게 무도의 뿌리를 내렸다. 외삼촌은 그 도시 유도의 전설 중 한 명이었다. 고 신도환 신민당 국회의원과 함께 한국 유도협회에서 사후 명예 10단에 추존한 당시까지 둘 뿐인 사람이었으니.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안병근과 김재엽이 대를 건넌 제자였다 한다.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사범으로 많은 곳에서 초빙을 받았지만 수입은 언제나 변변치 않았다. 그 봉급으로 6남 1녀를 키우고 가르쳐야 했으니 오죽했을까.

 

그런 사정을 알고 어머니가 외삼촌을 대신해서 외갓집 남매 중 위의 세 형들한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대학 학비와 용돈을 다 대셨다는 게다. 그제야 어머니가 세상 떠나고 난 다음 군대 휴가 온 둘째 형이 자기 집보다 우리 집을 먼저 들러 그렇게 서럽게 울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형들에게는 그런 고모의 마음이 사무쳤던 것이다.

 

3.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보다 이미 나는 십몇 년을 더 살았다. 어머니 꿈을 꾸지 않은지도 까마득히 오래되었다. D시를 비껴 흐르는 금호강 다리 옆에 집안이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사찰이 있다. 20여 년 전 선산을 정리하고 묘를 이장하면서 큰 시주를 했다. 그곳에 지금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8월이 되면 형님 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함께 모시는 제사 지낸 후 절을 찾는다. 설과 추석 명절 때 차례 지내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각지에서 모인 스무 명 넘는 자식과 손주들이 위패 앞에 엎드려 재배를 드린다.

 

나는 절을 하며 극락왕생을 외운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 그곳에서는 부디 이생에서 한 시도 놓지 못했던 자식들 걱정 내려놓으시라고. 활짝 피어난 꽃처럼 평온한 휴식만 누리시라고.

 

10월의 가을 하늘은 뭉게구름을 안고 푸르기만 하다. 마흔일곱의 이른 나이에 가셨으니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고우신 모습을 간직하고 계실 게다. 평생을 노새처럼 짊어졌던 책임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내를 보낸 후 33년 세월을 넋을 잃고 흘러 보낸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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