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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문학·예술기행] 로맹 가리와 코트다쥐르 니스

 

1980년대 한국.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낭만과 인정은 살아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갈망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 기동대는 살벌했다. 사이렌이 울리고 돌과 화염병이 날아가고... 모진 풍파 속에서도 대한민국 청년들은 꿋꿋하게 그들의 젊음을 만끽했다. 대학가요제가 열리고 청바지에 통기타를 맨 선수들이 출전해 멋들어진 노래를 하고, 수상작들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이런 여유 덕에 우리는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것이 아닐까. 그 추억 속에 ‘모모’가 있다. 가수 김만준 씨가 불러 대히트한 곡.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이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수 없다는(...)”

 

‘모모’는 모하메드의 애칭

 

발랄하고 경쾌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우리는 그저 흥얼거렸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결코 간단치 않다. ‘모모(Momo)’. 모하메드의 애칭이다. 열 네 살의 알제리계 소년. 그는 파리 20구 벨빌(Belleville)에 있는 로자 아줌마네 집 7층에 산다. 이 아줌마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해 매춘부 생활을 했다. 그녀는 젊은 동료가 버린 모모를 애정으로 돌봐준다. 죽을병이 들었지만 병원 가길 거부한다. 영리하고 예의바른 모모는 그녀를 열심히 간호한다. 소설 ‘자기앞의 생(La vie devant soi)’의 줄거리다. 작가 에밀 아자르(Emile Ajar)는 노후와 죽음의 공포를 사랑의 공동체가 유쾌하게 격퇴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1975년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 공쿠르상을 받은 ‘자기앞의 생.’ 프랑스 아카데미는 그해 이 상의 주인공 에밀 아자르를 호명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는 술렁였다. 무슨 일이지? 에밀 아자르는 도대체 누구지? 나흘째 되던 날, 수상자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상을 받지 않겠다는 통보만 했다. 아카데미 위원회는 “공쿠르는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상이다. 만약 이 상을 원치 않는다면 아자르씨가 상금을 다른 작품에 줄 자유가 있다”라고 반박했다.

 

작가들의 로망, 공쿠르상을 거절한 에밀 아자르

 

왜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일까? 에밀 아자르는 다름 아닌 로맹 가리(Romain Gary)였기 때문이다.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이미 공쿠르상을 받은 가리. 이 상은 한 번 타면 더 이상 탈 수 없는 규칙을 깨고 가명으로 또 다시 응모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프랑스 아카데미는 공쿠르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가리는 그만 당황했다.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것을 밝히면 얼마나 큰 비난이 쏟아질 것인가? 여변호사 지젤 알리미는 가리가 언론의 신랄한 비판을 피하고 조용히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상을 거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가리는 이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사촌동생 폴 파블로비치를 에밀 아자르로 분장시켜 언론과 인터뷰를 시켰다.

 

기발하고 파격적인 로맹 가리. 일주일에 60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쓴 천재 작가였다. 그가 공쿠르상을 받은 두 작품 모두 1주일 만에 쓴 것이다. 신이 인도해 글을 썼다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작가 외에 비행사, 레지스탕스, 외교관, 엽색가였고 드라마 작가에 영화감독까지 다재다능했다.

 

영화촬영 중 당시 최고의 미국배우 진 세버그(Jean Seberg)와 결혼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늙는 게 싫어 1980년 12월 권총자살을 함으로써 또 한 번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로맹 가리는 프랑스 이방인

 

프랑스를 쥐락펴락했건 가리. 그는 리투아니아 태생이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이 소년은 러시아 소극단 배우였던 어머니 손을 잡고 1927년 프랑스 니스(Nice)에 도착했다. 이들은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을 피해 폴란드로 이주했지만, 그곳의 유대인 박해가 극에 달하자 이곳으로 피난 왔다. 이 모자(母子)는 니스의 셰익스피어 거리에 있는 메르몽 여관에 한 동안 머물다 소나무 숲 해안가 마을 로크부륀(Roquebrune)에 정착했다.

 

어머니 미나는 로맹을 매우 좋아했고 그를 위해 뭐든 했다. 그녀는 네그레스코(Negresco) 호텔 매점에서 향수, 라이타 등 잡동사니를 팔았다. 미나는 아들에게 프랑스 문화를 열심히 가르쳤다. 로맹은 매년 열리는 니스의 카니발을 좋아했다. 이러한 소년기를 로맹은 그의 자전적 소설 ‘동틀녘 약속(La promesse de l'Aube)’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욕망과 가난이 어우러지고 어머니와 아들의 진한 사랑이 그려져 있다.

 

 

니스, 로맹 가리의 오아시스

 

‘하얀 개’에서 그는 “나의 사랑하는 도시 니스는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라는 말을 했다. 로맹은 이곳에서 초·중학교를 다녔고 프랑스 국적을 받았다. 그 후 엑상프로방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파리로 떠나 아카데미 회원이 됐고 프랑스 대사가 됐다. 그는 “나는 프랑스 피가 한 방울도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내 예술적 영감에는 항상 프랑스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 프랑스 중에서도 로맹이 예술적 영감을 가장 많이 받은 니스. 그는 이곳을 잊지 못하고 자주 찾았다. ‘자기앞의 생’에서 그는 니스를 숲으로 둘러싸인 바닷가의 오아시스로 표현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우정에 눈뜨고 사춘기를 겪으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곳, 이곳이 바로 지중해 곁 니스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최고의 친구는 지중해였고, 죽으면 화장해 지중해에 뿌려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런 로맹 가리를 니스 시도 사랑했다. 가리 산책로를 만들어 로맹 가리에게 헌정했고, 니스의 전통 도서관 이름을 로맹 가리로 바꿨다. 그리고 자유로운 프랑스의 영웅, 외교관, 사랑스런 인간, 작가 등 최고의 이름들을 붙여줬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자기앞의 생’의 훈훈한 관계를 다시 한 번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스는 파가니니, 마티스, 니체 등 수 많은 인물이 머물다 간 곳이기도 하다. 예술가, 철학자들이 사랑한 이곳, 프랑스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코트 다쥐르(Cote d'Azur: 지중해 연안)에 펼쳐져 일 년 내내 햇빛이 반짝인다. 따뜻한 기온과 포물선의 도시 니스는 해수욕장이 너무 아름다워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하지만 이 광경이 니스의 전부는 아니다. 언덕을 굽이굽이 넘어 계속되는 영국인 산책로. 니스 한 가운데의 파이옹 산책로(Promenade du Paillon)에서 몽 알방(Mont Alban)까지 이어지는 42킬로 해안길. 거기서 만나는 지중해의 희귀한 군락지들. 대장관이다. 콜린 뒤 샤토(Colline du Château)에서 바라본 파노라마와 도시 중앙의 녹색정원은 어떠한가. 푸른 지중해를 제압하여 독특한 장면들을 연출하지 않던가. 서쪽 해안가에 있는 투르 벨랑다(Tour Bellanda). 연인들이 누워 석양을 바라보기에 최상이다. 거기에 기암괴석들이 만드는 풍경, 19세기의 고전적 별장들, 코코비치(Coco Beach)의 경이로운 해안선.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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