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누나만 셋. 나이 터울은 10살, 8살, 5살. 지난해 초선으로 정치에 입문한 정종혁(민주·서구1) 인천시의원은 집안에서 귀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천 부평 산곡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우수한 성적으로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는 명석한 아들이었지만, 친구들을 위해 답안지를 보여주다 걸려 시험에서 0점을 받은 쓰린 기억도 있다.
그래도 언제나 그를 믿어주는 부모님 덕에 곧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아버지의 권유에 지역의 한 명문고를 지망했지만 떨어져 원치 않는 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낙심하는 그를 본 아버지는 온 가족과 함께 서울 목동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그는 학업에 충실했다. 연세대 세라믹공학과에 들어갔고 2009년 현재의 지역구인 서구 청라에 살게됐다.
그동안 너무 공부에 매진했던 탓이었을까. 오히려 대학교에서는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2013년 졸업할 때쯤 그의 학점은 3.0을 가까스로 넘었다.
공대를 나온 그는 졸업을 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결정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기업을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오로지 본인의 판단으로 세무사가 되기로 했다.
세무사 시험 준비도 술술 풀렸다. 첫 1차 시험에서 커트라인보다 20점 높은 점수를 얻었다. 1차를 통과하면 2차 시험을 두 번 치를 기회가 주어진다. 1년 뒤 두 번째 2차 시험을 노리면서 마음 편하게 공부했다. 바로 치른 2차 시험은 1점 차이로 떨어졌다.
‘조금 더 열심히 해볼걸’이라는 아쉬움이 드는 동시에 ‘내년에 2차는 무조건 붙을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도 들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하지만 인생에 맑은 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2차 시험을 치르는 날 공교롭게도 그에게 복통이 찾아왔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었고 탈진한 상태로 시험을 봤다. 당연히 떨어졌고 세무사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건설업 쪽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일용직으로 공사현장을 찾았다. 일명 ‘노가다’ 현장을 누비며 3개월 정도 일했을 때 아버지가 그를 해고했다. 다시 세무사 준비를 해보라는 뜻이었다.
정 의원은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아저씨들과 막걸리를 마시는데, 남들에게 내가 짤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알고 보니 고된 일에 내가 금방 그만둘 것으로 생각했는데, 계속 일을 하자 아버지께서 나를 해고했다”고 회상했다.
다시 1차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그에게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이었다. 다행히 1차에 붙었고 기대없이 치른 2차 시험도 합격했다.
이후 국내 유명 세무법인에 들어가 1년 조금 넘게 일하다가 회사를 나왔다. 아버지가 서구에서 정치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비록 정 의원의 아버지는 경선에서 떨어졌지만, 정 의원은 이를 계기로 민주당 서구 청년위원회에서 활동을 이어갔고, 지난해 9대 인천시의회에 입성까지 했다.
교육위원회에 있는 정 의원은 자신처럼 학업을 위해 서울로 가는 일이 없도록 인천의 교육 발전에 힘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 의원은 “교육 때문에 나도 떠나본 경험이 있다. 인구가 유출되는 도시는 미래가 없다”며 “사람이 유입될 수 있고 서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다. 교육위에 들어간 것도 이같은 이유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청라시티타워부터 청라 소각장 문제 등 각종 현안도 함께 관심을 갖고 있다”며 “비록 초선이지만 전문직종에 일해본 경험이 남들과 다른 큰 자산이다. 지역구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 경기신문 / 인천 = 조경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