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작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습지에서 쿼터 백 출신의 남자 체이스(해리스 딕킨슨)가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데서부터이다. 이 사체는 동네 아이들이 발견하는데 그건 마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첫 장면과도 같다. 보안관 둘이 탐문을 시작하고, 이들은 오로지 남자 몸에서 나온 붉은색 털실 한 오라기를 근거로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성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다.
영화는 카야의 재판 과정을 추적하며, 여자 스스로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변호사인 밀턴(데이빗 스타라탄)에게 지난 10년의 삶을 들려주거나 진술하는 플래시 백의 기법을 따라 대부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처음엔 미스터리 살인극으로 시작된 영화가 곧바로 서정의 서사시를 이어 나가는 이유다.
카야, 아니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습지 소녀’라 불리는 캐서린 대니얼 클라크는 말 그대로 습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다. 극도로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엄마는 아이들을 버리고 떠났고 위의 언니 둘 그리고 오빠도 떠났으며, 마지막에는 결국 모든 비극의 장본인인 아버지 마저 떠나면서 완벽하게 홀로 남아 살아가게 된다.
엄마가 떠났을 때가 1959년, 체이스의 살인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된 것은 1969년. 이 10년간 카야는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며 카야가 아닌 미스 캐서린 대니얼 클라크가 된다. 그녀에게 처음 글을 가르쳐 준 사람은 동네 꼬마로 같이 자란 첫사랑 남자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이다. 육체적인 사랑을 시작한 것은 체이스가 처음인데, 한편으로 유일하게 그녀를 친자식처럼 대해 준 사람들은 잡화점 흑인 부부 점핑과 마벨(스털링 메이서 주니어, 미셸 하이트)이다. 하지만 삶의 모든 것을 가르쳐 준 주인공은 바로 습지, 그러니까 자연이다.
카야는 글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연을 기록하고 그리기 시작한다. 깃털 하나만으로 어떤 새인지 알아차리고 작은 껍데기만으로 주로 어디서 서식하는 조개인지를 알 수 있게 될 정도로 습지 전문가가 된다. 그녀가 쓰고 그리는 글과 그림은 이후 세상에서 엄청난 유명세를 얻게 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카야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정말 그리고 과연 카야의 두 번째 애인이었던 체이스는 누가 죽였을까. 버젓이 약혼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야를 탐했으며 아버지처럼 그녀에게 폭력을 가했던 만큼, 누군가가 그러니까 첫 번째 애인이자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테이트 아니면 그녀를 딸처럼 사랑하는 흑인 아저씨 점핑이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혹시, 정말 혹시 그녀를 어릴 때부터 지켜봐 왔던 변호사 밀러 같은, 누군가가 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을까. 머릿속에는 의문 부호가 줄을 지어 떠올려진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위대한 시적(詩的) 감수성인데, 영화를 보면서 실은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느끼게 된다. 정작 궁금해지는 것은 가재가 노래를 부르는 곳이란 게 진짜 있는지, 있다면 어떤 곳인지가 실로 알고 싶어진다.
더 중요한 건 자연친화적이라는 것, 자연에 동화된 삶이란 어떤 것이고 그게 지금처럼 첨단 자본주의가 이끄는 초고속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까짓 체이스의 살인범 따위는 이 영화가 내세우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그러니까 맥거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영화의 원작이자 델리아 오웬스가 쓴 대서사의 동명 소설은 결국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위대한 숲의 철학이자 정치적 사상에 기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1959년에서 1969년 사이 카야의 습지 밖 세상은 격렬함 그 자체였다. 노스캐롤라이나(버지니아 아래, 조지아 위에 위치한 동부의 시골 지역) 바깥에서는 2차 대전 이후, 민권 사상이 대두하며 기존 기득권 층과의 충돌이 일어나던 때이다. 보수적 가치란 게, 낡고 이기적이며 집단의 탐욕과 가혹한 편견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날 때였고, 억울한 죽음과 희생이 이어지던 때였다. 바야흐로 베트남전의 수렁으로 빠져들 때이기도 했다.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 말콤X와 마틴 루터 킹 모두가 암살되던 때도 바로 이 10년간이었다.
그래서 카야의 지지리도 못나고 폭력적이며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하게 들린다. 2차 대전 참전자인 아버지는 카야에게 늘 이렇게 얘기한다. “바깥세상은 무서운 곳이야. 늘 조심해야 해.” 꼭 아버지의 말 때문은 아니지만 카야는 이곳, 습지가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습지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데, 이는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엄마와 언니들, 특히 오빠를 기다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오빠 조디(로건 맥리)는 훗날 군인이 돼(아마도 베트남전 참전 후 제대 전에) 그녀를 다시 찾는다.
돌이켜 보면 모두가 카야를 버린다. 심지어 그렇게 사랑했던 테이트조차 도시로 대학생활을 하러 가서는 잠시이긴 해도 그녀를 버린다. 체이스란 마초는 그녀를 때리고 짓밟아 차지하려 함으로써 사실상 그녀를 버린 셈이 된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엄마와 가족 모두가 그녀를 버릴 때 유일하게 카야를 버리지 않은 것은 습지이다.
자연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는다. 자연과 습지는 그녀를 차별하지 않으며 그녀를 그냥 ‘다른 존재’로 받아들인다. 카야가 자연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자연 역시 그녀를 있는 그대로 품에 안는다. 그 단순하고 진실한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카야가 자연에게서 느끼는 것은, 자연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늘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야도 세상과 삶의 진리를 늘 변화하는 것에서 찾으려 한다. 새의 부화처럼, 조개가 썰물과 밀물에 휩쓸려 자리를 바꾸는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려 애쓴다.
하지만 사람과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변화를 두려워 하고 심지어 변화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과 세상이 그녀에게 가혹하게 구는 이유이다. 변호사 밀턴의 얘기대로 지난 25년간 들었던 모든 악소문으로 카야를 판단하기보다 지금의 성장하고 변화된 카야의 모습에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자신들만의 잣대로 카야라는 여자가 야생에서 살면서 몸을 헤프게 굴려 결국 남자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시스템에 들어와 있지 않거나 자신들의 시스템이 저 한 사람 때문에 바뀐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극렬하게, 광적으로 반발한다. 집단의 광기를 작동시킨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그 옛날 하퍼 리가 썼던 ‘앵무새 죽이기’의 2020년대 판 작품이며,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역시 그레고리 펙 주연의 1962년작 ‘알라바마 이야기(원제는 ‘앵무새 죽이기’)의 현대판 작품이다. 밀턴 변호사 역의 데이빗 스트라탄에서 묘하게도 핀치 변호사 역인 그레고리 펙의 느낌이 난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를 만든 올리비아 뉴먼은 고전의 작품에서 캐릭터의 이미지를 가져왔을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일부 항간의 다소 잘못된 얘기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얘기한 환경 영화가 아니다. 자연의 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 안에 있는 속살은 얼마나 찢기기 쉽고 상처받기 쉬우며 그래서 삶 자체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문명화되고 현대화됐다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들에게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르는 영화이다. 지성의 비관주의로 살아가되 의지의 낙관주의를 잃지 말아야 함을 주인공 카야는 일생을 통해 웅변해 주고 있다. 지난해 말 극장 개봉작 가운데 최고 수작이다. 현재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