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유산 15개 가운데 조선 시대 임금이 살았던 창덕궁, 묘소인 왕릉, 그리고 제례를 지내는 종묘가 포함돼 있다. 놀라운 것은 조선 태조에서 순조에 이르는 왕과 왕비의 능 40기가 모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왕릉이 서울, 경기, 강원에 흩어져 있지만 모두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고, 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자연과의 조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전례에 힘입어 현재 경기도, 충청남도, 경상북도는 조선 임금의 태실(胎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태실은 탯줄을 묻은 곳이다.
조선 왕실은 태(胎)가 그 주인의 안녕은 물론 국운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고 왕자와 공주의 태를 격식에 따라 잘 보존한 뒤, 전국의 명당자리를 찾아 태실을 만들었다. 그 후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 화려한 석물(石物)로 다시 치장하는 가봉(加封)을 해 더욱 엄격히 보존했다. 이런 왕실의 장태(藏胎)문화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유산이라고 한다. 일제는 조선의 기운을 뺏고자 이 태실을 훼손하고 태를 한곳에 모아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현재 서삼릉의 태실이다. 이렇게 훼손된 태실들이 다시 복원돼 문화재로 지정되고 있다. 이런 조선 임금 태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경우 조선 임금의 출생(태실), 재위(궁) 그리고 사후(왕릉, 종묘)의 유적이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는 완결성을 갖게 됨은 물론 우리 민족의 독특한 생명존중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고, 전국 곳곳에 세계적인 관광지가 생겨 지역의 활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로 경북 성주는 세종대왕자 태실을 중심으로 생명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경기도에도 두 개의 국왕 태실이 있었다. 성종과 중종의 태실이다. 이 가운데 가평군에 있는 중종대왕 태실은 처음 태실이 설치된 초장지(初藏地)에 복원된 태실로서 전국 6곳 중 한 곳이고 경기도에서는 유일하다. 그만큼 태실의 위치를 정할 때 핵심적인 기준인 풍수적 원리의 원형을 잘 확인할 수 있는 태실로서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다. 경기도가 태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다면 가장 최우선적으로 보존해야 할 곳이다. 더구나 이 중종대왕 태실로 인해서 가평현은 가평군으로 승격이 되었으니 가평군으로서는 부모와 같은 유적이다.
그런데 이 중종대왕 태실의 목을 자르고 제2경춘국도가 건설되고 있다. 현재 실시설계 중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기준 중 하나가 ‘보호 및 관리체계 : 법적, 행정적 보호 제도, 완충지역(buffer zone) 설정’이다. 완충 지역은 문화재의 가치를 보호하는 지역이다. 계획 중인 제2경춘국도는 태실로부터 채 100미터도 안되는 곳에 건설될 예정이다.
태실이 그곳에 만들어진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풍수적 경관을 심각하게 훼손하게 된다. 주민들은 그 문제점을 2년 전부터 줄곧 얘기했지만, 국토부는 묵살했다. 앞장서 막아야 할 가평군과 경기도 행정은 수수방관이다. 경기도 스스로 추진하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노력을 가로막는 길이 놓이고 있는데, 가평군을 탄생시킨 부모 같은 유적이, 잠재력이 엄청난 보물이 훼손되는데 해당 지자체는 뒷짐을 지고 있다. 세계적 유산이 될 수 있는 유적을 영구히 묻어버리는 길. 그 길 앞에서 경기도, 가평군의 행정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