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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문학예술기행] 기욤 아폴리네르와 코트다쥐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그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의 일부다. 이 다리는 파리 15구에 실제로 도도히 서 있다. 작자 기욤 아폴리네르. 그의 진짜 이름은 기욤 아폴리 나리 드 코스트로비츠키(Guillaume Apollinaris de Kostrowitzky). 1880년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신민으로 로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폴란드의 귀족 여인이지만 아버지는 누군지 모른다.

 

그는 대학도 가지 않은 괴짜다. 대학입학시험에 한 번 떨어지자 다시는 도전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공부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첫 직장으로 독일 귀족의 가정교사가 됐다. 그 집의 젊은 가정부를 사랑해 추근거렸지만 거절당했다. 실연의 고통을 어쩌지 못한 스무 살 청춘은 시로 발설했다. 이어 르뷔블랑슈에 ‘레레지아르크’라는 콩트를 발표했다. 이때 기욤 아폴리네르라는 사인을 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아폴리네르는 프랑스군에 참가하길 원해 프랑스 귀화를 결정했다.

 

미라보다리 외에 ‘알코올’, ‘칼리그람’, ‘시인의 죽음’, ‘루에게 보낸 편지’ 등 수많은 수작을 쓴 아폴리네르는 아방가르드 예술을 지지했고 큐비즘(입체파)과 초현실주의 대표자였다. 이 천재시인이 시적 영감과 감성을 단련한 곳은 프랑스 남녘 코트다쥐르(Côte d'Azur)였다.

 

유년기 그는 카프다일(Cap d'Ail)의 바위틈에서 친구들과 함께 억센 사투리로 떠들며 성게와 낙지를 잡았다. 이 유년의 추억을 그는 첫 작품들에서 떠올렸다. 요절한 아폴리네르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이때였을까. 그는 모든 작품에 코트다쥐르를 감초처럼 등장시켰다. 피카소는 파리에서 아폴리네르를 처음 만났을 때 남쪽 억양이 심했다고 말했다. 아폴리네르는 코트다쥐르 중 니스와 인연이 깊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두개골 수술을 받은 곳도, 스페인 감기로 1918년 죽은 곳도, 사랑하는 여인들 루와 마들렌을 만난 곳도 니스였다.

 

하지만 그의 에로틱한 정서를 한껏 자극한건 이보다 군침 돌게 하는 남녘의 음식이었다. 아폴리네르는 먹보였다. 그는 언제나 음식에 대한 본능적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니스의 ‘다부토(Da Bouttau)’식당에서 음식을 먹다 후에 연인이 된 루(LOU)를 만났다. 죽기 직전 아폴리네르는 니스의 한 요리사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앙드레, 내 대신 니스에 안부 전해주게. 팔리콘 지하식당에서 다혈질들(친구들)과 다부토 스튜를 먹고 마르셰의 피살리데르(피자의 일종)를 맛보는 것을 잊지 말게.”

 

세기 말의 코트다쥐르는 범세계적이고 생동적인 그리고 상쾌한 풍경 속 거리였다. 빛나고 태평스런 유럽을 재창조한 심장. 그곳은 오늘도 변함없이 눈이 시리게 파란 물결과 풍미로 우리를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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