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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근대 최대기업 백산과 기업가 안희재의 최후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양정의숙 경제과를 졸업한 안희재는 연해주의 중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연해주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과 애국지사들로 붐볐다.

 

근대 조선에서 드물게 경제학을 공부한 안희재의 눈에 들어온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재정난이었다. 독립을 주창하며 사자후를 뿜어내는 지사들이 들끓고 독립군에 지원하는 열혈청년들이 넘쳐났지만 그들의 활동과 무장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이 없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안정적으로 독립투쟁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안희재는 가장 빛이 나지 않는 그 일을 자신이 맡기로 했다.

 

고향 의령으로 돌아온 안희재는 제지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이 잘 되었지만 그 정도의 수입으로는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독립자금을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경상도의 거부였던 아버지 안발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2000마지기(40만 평)을 팔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는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기업인 동시에 국내외를 연결하는 독립운동 거점이었다. 안희재가 국내에서 선구적으로 백산상회를 근대적 형태의 합자회사로 전환한 것은 1917년이었다. 그는 경상도의 재력가 윤현태와 함께 합자회사의 대표를 맡았고, 경주 최부자로 알려진 최준을 무한책임사원으로 합류시켰다.

 

안희재가 합자회사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전환한 것은 1919년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자본금은 거금 100만 원이었고, 참여한 주주들은 40인이었다. 그가 참여시킨 주주는 윤현태, 최준, 조동욱, 정재원, 이종화, 윤병호, 허걸, 이우석, 김상익 등 영남의 쟁쟁한 재력가들이었다. 항일성향을 지닌 영남의 거부들이 모두 투자에 참여한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일약 최고의 근대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기업은 자본력과 영업기반이 생명이다. 막강한 자금 동원력과 전국에 기반을 가진 주주들이 집결한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기업이었다. 그런데도 늘 적자였다. 벌어들이는 돈 보다 보내야 할 독립자금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백산주식회사의 주주들은 투자금에 대한 배당은커녕 모자라는 독립자금을 별도로 내놓아야 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내놓은 주주가 초대 사장으로 이름을 올린 최준이었다. 300년을 이어온 경주 최부잣집의 장손인 최준은 안희재가 요구하는 독립자금을 내주면서도 내심 의구스러웠다. 받아가는 돈이 얼마나 독립자금으로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독립자금의 모집과 전달, 사용은 기밀이 생명이니 따질 수도 없었다.

 

1942년 만주의 목단강성 형사대에 체포된 안희재는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악형에 시달렸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자 일제는 그를 병보석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그는 출감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에 그가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은 애국 기업가로서 그의 통찰력과 자질을 마지막까지 보여준다.

 

‘앞으로 2년이면 일본은 패망할 것이고, 우리나라는 독립할 것이다. 너희 형제들은 앞으로 곤란한 처지에 놓였을 때는 스스로의 양심에 물어 처신해라. 빈 산에는 과수나무를 심어라.’

 

그의 예언대로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으로 돌아온 김구주석은 경주 최부자 최준을 만나 안희재를 통해 받은 독립자금 장부를 보여주었다. 최준이 안희재에게 준 액수와 단 한 푼의 차이도 없었다. 최준은 안희재가 묻힌 남녘 하늘을 내다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근대 한국의 기업인은 이토록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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