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다 ‘그놈의’ 토드 때문이다. 토드는 강아지다. 유기견이다. 이런 강아지가 흔히 그렇듯 분리불안증이 심하다. 그래서 자주 짖는다. 동네 주민들이 난리다. 집 주인도 결국 방을 빼라고 한다.
견주인 존 체스터와 아내 몰리는 이사를 갈 바에야 아주 색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찾으려 한다. 바로 토드가 뛰어놀 수 있고 마음껏 짖을 수 있는, 그리고 온갖 동물과 식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농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작은 농장’은 이처럼 존&몰리 부부의 불가능하고 무모한 농장 운영 도전기를 그린 내용의 작품이다.
존 체스터는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이다. 주로 동물 다큐를 찍어 왔다. 몰리 체스터는 건강식 요리 전문가이다. 이 모든 일은 강아지 토드에게서 비롯됐지만 아내 몰리의 입버릇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건강한 요리를 위해서는 채소는 직접 재배한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해 왔고 그래서 그녀는 늘 방울토마토부터 바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재배할 꿈에 대해 얘기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다큐의 제목은 몇 가지 점에서 의도적인 거짓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작은’ 농장이 아니다. 존&몰리 부부가 사들인 땅은 8만 헥타르, 곧 24만 평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영화는 제목만으로는, 그리고 내용의 아우트라인만으로는, 유쾌하고 귀여운 성공담을 담고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처음엔 즐겁게 시작하지만 중간에 매우 심각해지며 나중엔 진지한 성찰로 이끈다.
이건 성공기라기보다는 고난기에 가깝다. 가장 인상적인 존 체스터의 대사는 ‘타협 없는 이상주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들 부부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였다. 아파트 베란다 화단 정도나 키우던 젊은 부부였다. 그런데 황무지를 농장으로 바꿔낸다고? 그것은 결코 이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나무가 많아지면 새가 몰려들고 새는 과일을 죄 쪼아 먹어 대서 모두 못쓰게 만든다. 오리 수백 마리는 건기의 호수를 배설물로 채우게 해서 저수지의 물고기를 죽게 만든다. 숲이 우거지면 나무에 진드기와 달팽이가 들끓는다. 동물들이 많아지니 당연히 코요테의 습격이 잦아져 닭들이 거의 죽어 나갈 지경이 된다. 코요테는 존&몰리 부부의 캘리포니아 농장 ‘애프리콧 레인’의 유일한 생산품이자 자본의 동력이 되는 싱싱한 계란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존 체스터는 결국 엽총을 든다. 타협 없는 이상주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가 코요테를 사살한 직후 그 사체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다.
다큐 ‘위대한 작은 농장’은 어쩌면 1960~70년대 미국에 풍미했던 히피즘의 부활을 은밀하게 얘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존 히피 운동에 환경과 동물보호, 생태계 복원을 덧붙인 일종이 뉴히피즘적 색채가 강하다. 기존 히피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며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둔 운동이었다. 종교적이면서도 정신적 해방과 이념적 자유, 문화적 생활을 꿈꾸던 일군의 젊은이들은 집단생활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히피들은 결국 과도한 약물 남용과 그룹 섹스 등 루저들의 문란한 집단생활로 변질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존&몰리 부부의 농장이 시도될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이 주장하는 생태환경론에 동의한 사람들, 곧 에인절 투자자들이 모였기 때문인데다 실질적인 농장 운영도 앨런이라는 이름의 생태 이론가가 멘토로 참여하고 다수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인 노동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다큐에는 잘 안 나타나지만 이들은 농장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존과 몰리의 농장은 결국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스템을 꿈꾸고 있는 셈이다.
다큐의 제작 방식과 제작 주체, 내러티브 구성과 서사가 돋보인다. 이건 다큐지만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마냥 탄탄한 스토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8년간 틈틈이 찍어 내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놀랍다.
존 체스터는 동물다큐 촬영감독 출신답게 몰리가 땅을 사자고 할 때부터, 그리고 그들이 강아지 토드를 입양한 순간부터 애프리콧 레인 농장이 7년 만에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결국 이 모든 것이 궁극의 엄청난 ‘기록’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 컷 한 컷 장면을 찍어 놓았다. 그것도 그 무수하고 험난한 농장 일을 병행하면서. 엔드 크레디트를 보면 이를 위해 4명의 보조 촬영감독이 동원됐음을 알 수가 있다. 존 체스터에겐 한 마디로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제작의 단계와 과정도 매우 계획적이었는 바, 장편을 한꺼번에 편집하는 것보다 단편 하나하나, 곧 부분 부분을 완성해서 나중에 이를 모두 합쳐 장편으로 재 편집하는 방식을 택했다.
‘위대한 작은 농장’을 내놓기 전 ‘엠마 구하기’ 등의 단편을 발표하는 방식이다. 결국 하나하나, 차곡차곡 만들어 낸 다큐인 셈이다. 엠마는 존 부부가 처음으로 키운 암퇘지 이름이다. 엠마는 계속 새끼를 낳았는데 한 번에 17마리씩 낳았고 너무 번식력이 강해 그것이 어느 순간엔 존의 최대 고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위대한 작은 농장’은 결국 공존에 대한 얘기이다. 그런데 이 공존은 꼭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공존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적대 관계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공존은 평화와 전쟁이라는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의 기묘한 합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 생태계에서라면 그것은 늘 합리적이며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다.
존 체스터가 결국 코요테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 모든 작물을 파먹는 포식자 쥐들을 위해 올빼미를 풀어 놓게 된다든지 하는 것, 모든 피복작물에 기생하며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달팽이들을 오리가 잡아먹게 한다든지 하는 것 등등이다.
올빼미 87마리가 두더지 1만 5천 마리를 없앤다. 오리는 거의 모든 달팽이의 포식자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유기체는 죽음을 생명으로 재탄생시킨다. 자연과 동물은 수억 년 동안 그렇게 생태계를 유지시켜 왔다. 인간만이 그러지 못하며 산다.
‘위대한 작은 농장’은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을 살리려는 한 부부의 애처로운 노력을 그리는 것을 넘어 인간 사회에 대한 더 큰 메시지, 더 깊은 정치사회적 의미를 던지고 있다. 인간은 지금 당장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환경영화가 아니다. 매우 정치적 순도가 강한 작품이다.
서사의 구조도 매우 발칙하다. 영화는 남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대한 산불이 난 것으로 시작한다. 존이 몰리를 향해 워키토키로 외친다. 빨리 피해야 해! 다 버리고 집에서 빨리 나와! 그 직후 영화는 이들의 LA 도시 생활로 플래시 백한다. 토드를 입양하는 과정과 거대한 규모의 황무지를 매입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아까 첫 장면이 대형 산불 모습이었으니 이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된다는 얘기일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결국 언해피 엔딩이라는 얘기일까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그 미스터리를 앞단에 슬쩍 덫처럼 던져 놓은 이야기 솜씨가 돋보인다.
재미있게 그러나 진지하게. 자연은 늘 활력이 넘치지만 늘 겸손하고 성찰이 있는 노동을 요구한다. 바로 그 양가(兩價)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얻는 것이 많다. 적어도 타협 없는 이상주의는 없다는 말 하나 정도는 남는다. 이상과 현실이 늘 부딪히는 것은 그 같은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 이슈의 해법은 놀랍게도 자연의 순환 법칙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 다큐가 전 세계에서 삽시간에 주목을 받았던 이유이다. 그런데 강아지 토드는 어떻게 됐을까.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