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계의 이단아 급 감독인 미이케 다카시의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사무라이 검객 영화이다. 한때 최고의 배우였던 기무라 다쿠야가 주연이다. 칸영화제가 공식 초청한 작품이었다.
칸 영화라고 해서 다 좋은 작품이거나 예술적인 무엇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칸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상한 착시이다. 칸도 수백 편의 영화를 담아내야 할 컨텐츠 용기(容器)에 불과할 때가 있다. 게다가 감독 이름값이 높으면 무조건 선점부터 하려고 하는 나쁜 습성도 있다.
영화를 보지도 않고 무조건 낙점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대체로 B급 영화들까지 칸에 가게 된다. 그리고 칸에 간 작품들은 언제부턴가 거의 전부가 부산국제영화제에 걸린다. 그때도 똑같은 논법이 적용된다.
부산에서 유명 감독의 영화가 상영됐다 해서 다 좋은 작품만이 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이 영화가 칸과 부산을 거쳤으면서도 국내에는 수입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국내 미개봉작이었던 탓에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오면서 신작 느낌을 준다.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2017년 작이다.
주인공 만지(기무라 다쿠야)는 죽지 않는 불사신의 몸을 지녔다. 800년을 넘게 살아온 마녀 할멈이 그의 몸 안에 혈선충이라는 벌레를 넣어 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현상금 사냥꾼 100명과 싸워 그들을 싸그리 처치해 버리지만 그도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이었다.
팔도 잘린 상태였다. 혈선충은 잘린 팔도 붙게 만든다. 검에 베인 상처 모두는 거의 곧바로 봉합되고 치유되지만 상처는 마치 꿰맨 것 마냥 깊게 남는다. 얼굴에 가로로 깊은 상처가 나 있고 눈도 한쪽은 잃은 상태이다. 어쨌든 이 ‘1 대 100’ 사건 이후 50년이 지났고 그 싸움은 전설이 됐다.
그는 검객들 사이에서 ‘백인 살인귀’라고 불린다. 당시 일본은 막부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들의 하급 무사 격인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일도류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난다.
주인공 만지는 어느 날 이 일도류의 당주 아노츠 카게히사(후쿠시 소타)에 의해 부모를 잃은 소녀 린(스기사키 하나)의 호위무사가 되기로 한다. 린을 위한 만지의 대리 복수극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만지가 이러는 이유는 린이 과거 자신의 어린 동생 마치를 닮았기 때문이다.
미이케 다카시 표 작품인 만큼 영화는 상당히 고어(gore)하다. 숭덩숭덩 팔과 몸이 잘려 나가고 피가 철철 흘러넘칠 만큼 낭자하다. 영화 속 악당이자 모사꾼인하바키(다나카 민)는 나중에 몸이 두 동강 나 하반신이 날아갔음에도 칼을 쥐겠다며 땅바닥을 기어다닌다.
다카시의 스크린은 이렇게 늘 잔인한데 이상할 이만큼 쾌감이 높다. 현실적 비현실성이 극대화된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정신을 차려보면 그냥 영화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 일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엔 마니아 급 관객들이 많이 붙어 있다. 이 영화 ‘오타쿠’들은 한편으로 보면 미이케 다카시로서는 일종의 혈선충인 셈이다. 이미 사그라질 만큼 사그라진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 투혼을 살려 내는 존재들이다.
영화 속 인물 만지가 불사신의 육신이 길어질수록 검술은 약화되듯 미이케 다카시 역시 매니아들이 계속 존재하면 존재할수록 작품 수준은 점점 빛을 잃어 간다. 기이한 싱크로율이다.
다카시 감독은 2년에 12편의 영화를 찍을 만큼 다작의, 광기 어린 감독이다. 1960년 생으로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1991년 데뷔 이후 30여 년간 현재까지 100편이 넘는 영화를 양산했다. 1999년에 내놓은 ‘오디션’이나 2004년 작인 ‘착신아리’, 2006년의 ‘임프린트’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많은 ‘쓰레기’들도 만들었지만 2012년에 만든 ‘할복 : 사무라이의 죽음’같은 영화는 다카시의 예술혼이 꽤나 본능적인 역사 감각을 지녔음을 보여 준 작품이었다.
일본은 사무라이와 주군, 주변 권력과 지배 권력, 지방과 중앙의 끊임없는 싸움, 투쟁으로 점철된 사회이다.
그리고 그 정신과 정서가 지배하는 사회이며 이른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비뚤어진 계급 상승 욕망이 마치 가장 고귀한 것인 양 포장된 적도 있는데 그 궁극의 모습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으로 급격한 중앙집권 국가로 변신한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일본 천황의 강력한 직접 지배 시기가 열린 셈이다. 그전까지는 막부, 다이묘(영주)라 불리는 지방 토호들이 전국을 분할 점령했다.
사무라이란 이 다이묘의 지배 시스템인 막부 내 가신들을 호위하는 무사들이다. 사무라이에게는 그 충성의 순서가 자신이 모시는 가신, 주군이 가장 먼저이다.
메이지 유신은 이들 막부 그룹을 극도로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체시키는 과정이었으며 당연히 맨 앞 총알받이로 처리된 이들이 바로 사무라이들이다. 그 잔인한 시기를 그려 낸 영화로 국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모은 작품이 바로 사토 타케루 주연의 ‘바람의 검심’이다.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의 주인공 만지도 사무라이다. 그가 외톨이가 된 것은 자신의 주군을 죽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주군을 배신한 자여서 할복을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어린 여동생을 살리고자 억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도 사무라이의 정체성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이고 시대 배경은 메이지 유신이 점차로 가까워지던 때임을 짐작케 하는데 막부 연합(일종의 군벌 연합)이 린과 만지의 원수인 일도류 당수에게 종합 검술 학교의 설립을 제안하며 세력을 키워 나가려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막부가 관군(천황 쪽)과의 대결 구도를 염두에 두는 시기인 것처럼 보인다.
미이케 다카시는 역시 다카시인 양 이쪽도 저쪽도 아닌, 실존적 판단에 따라 자신이 검을 겨눠야 할 상대를 정하는 만지처럼(만지는 린에게 “누굴 죽여줄까”라고 묻고 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지금 나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이요”라고 말하는데 그때 그 상대는 당장의 원수를 죽이려 하는 다른 사무라이들이다. 그러니까 원수는 때론 원수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복합적인 정치관을 보여 준다. 다카시는 만지와 같은 비주류의 삶이 일본 사회를 이어가는 원동력의 실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원한 사무라이 정신이란 오히려 잘못된 주군을 베어버리고 불쌍한 어린 소녀를 지켜 주는 감상 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만지에게 혈선충을 주입한 요괴 할멈은 온갖 상처를 입고 끙끙대며 싸우는 만지를, 혀를 차며 바라본다.
“영생의 삶을 그렇게 저주하며 죽고 싶어 하면서도 살려고 애쓴다”고 동정 어린 핀잔을 한다. 그 여린 마음 때문에 너는 계속 살아가는 셈이라고 말한다.
일본 사회가 아무리 군국주의의 후신들, 센 척하는 사무라이 정신 운운하지만 사실 저 사회의 저류에는 지독한 인간주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의 진짜 얼굴은 거기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영화 ‘무한의 주인 : 불멸의 검’은 언뜻 일본에도 만지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래저래 일본 영화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