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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사라진 아버지, 잃어버린 부성을 위하여

132. 화란- 김창훈

 

지난 5월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된 영화 ‘화란’의 화란은 네덜란드의 한자어이다. 주인공 연규(홍사빈)는 야구 방망이로 폭력을 일삼는 계부(유성주)때문에 숨 막히는 가정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연규 집은 가난하다. 엄마는 치킨 집에서 일한다. 동네가 다 그렇다. 연규는 동네 깡패 치건(송중기)에게 거기(화란)는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산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연규는 영화 내내 네덜란드에 가지 못한다. 네덜란드 얘기는 영화 속에서 그렇게, 딱 한 번 나온다. 그러니까 영화 ‘화란’은 네덜란드와 사실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건 영화 ‘암스테르담’이 사실은 암스테르담과 상관이 없는 것과 똑같다.

 

 

‘화란’은 액션 누아르이다. 손톱을 펜치로 뽑고 못을 뭉쳐서 얼굴을 후갈기는 등등 폭력이 난무하는 편이다. 동네 깡패들과 지역 정치권이 야합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서 좋은 장면은 액션이 아니라 두 개의 대화 장면이다.

 

치건이 연규에게 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연규의 온몸엔 학교 애들에게 맞은 구타 자국이 있고 그의 왼쪽 눈 옆은 아버지한테 맞아 죽 찢어진 상태다. 연규는 18살이지만 그의 삶은 마치 50년은 살아온 만큼 구겨지고 닳아 있다.

 

희망이 없다. 꽤나 절망적이다. 연규는 자신은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며 자기는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동네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치건이 말한다. “그건 나도 그래. 근데 이 동네, 정말 X 같은 곳이란다.”

 

 

치건은 자기 밑에서 험한 일을 배우기 시작한 연규를 데리고 호수인지 저수지인지 모를 어딘 가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물 건너편 방갈로 같은 곳에서는 정치권 인사가 있고 치건 패거리는 거기에 돈과 젊은 여자를 보내 놓은 참이다.

 

치건은 자신이 어릴 때 낚시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물가에 갔다가 물에 빠졌고, 거의 죽다 살았으며, 그런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큰 형님인데 숨이 돌아오자마자 허겁지겁 아버지에게 가서 물어 본 말이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라고 물었어. 근데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치건의 아버지는 과거에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 뭔 일 있었니?” 치건은 덧붙인다. “그때 걔는 죽었어. 이미 죽은 거야.”

 

 

피가 낭자한 영화는 사실 속에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낭자한 피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피를 낭자하게 흘리게 만드는 사회와 세상을 지목하고 싶어 한다. 영화가 폭력을 소재나 테마로 하는 이유는 개인의 폭력보다는 공간과 사회구조, 세상이 자행하는 폭력의 강도가 더욱 잔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그것이야말로 상충되는 단어가 짝을 이룬 ‘폭력의 미학’이란 말의 의미이다. 샘 페킨파가 서부극에서 보여 준 발레 같은 총격 씬, 박찬욱이 보여 주는 극악한 폭력 심리 등등과도 다 연결돼 있다. 액션 누아르가 찌르고 베이는 장면 너머 뭔가를 지니고 있는가 여부는 작품의 완성도와 연결된다.

 

‘화란’은 그 지점을 찾아가고 돌파하려 애쓰고 어딘 가엔가 정서적 큰 덩어리를 만들려고 한다. 그 점을 높이 사야 하는 작품인 바, 더욱더 놀랍게도 감독 김창훈은 이번이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신인이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든 셈이다.

 

 

영화 ‘화란’에는 두 가지가 부재하다. 하나는 부성이 없다. 영화 속에는 아버지란 존재가 없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있다. 그러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나 아예 없는 것이 낫다. 그럼으로 부성, 그리고 흔히들 얘기하는 부성애가 없다.

 

부성만 있으면 기계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의 사회일 뿐이다. 올바른 가부장의 집안 관계, 아버지의 권위가 서 있는 가족이란 부성애가 진실되게 구현되는 관계를 말한다. 툭하면 애들을 때리고 패는 아버지 밑에서는 아이들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부성애가 없다. 진짜 아버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버지들이 아이를 구하기보다는 위험 지구로 내 모는 형국만 그려진다. 이런 세상은 살만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영화가 절망을 그리고 있다는 이유이다.

 

 

영화 속에서 또 하나 없는 것은, 그리고 이건 기이하게도 실재로 한 번도 극 중에서 드러나지 않는데, 공권력=경찰이란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경찰이나 사법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경찰이란 실체는 어쩌면 사회 내에 작동하는 부성의 가치관을 대변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의존성을 갖게 된다. 사람들도 사회 내의 권위적인 무엇(정치, 판사, 경찰 등)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건 것이 이 영화에는 없다. ‘화란’은 아예 그런 존재를 깔아뭉개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실제 사회에 그런 카리스마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극 중 두 인물은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의사(擬似, 가짜) 부자 관계로 만들려고 한다. 치건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연규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고 그냥 형이라고 하라고 한다. 이때부터 연규는 치건을 형이라고 부른다.

 

그건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두 단어의 어감 차이는 크다. 그건 애정의 밀도와도 관계가 있다.

 

치건은 치건대로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경험, 그래서 자신이 죽고, 거꾸로 아버지가 죽어 버린 인생에서 연규를 통해 유사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내려 한다. 자기 식의 부성의 회복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고 싶어 한다.

 

이 영화 ‘화란’은 결국 잃어버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얘기이다. 진정한 의미의 부성의 회복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이다.

 

 

영화가 어마어마하게 폼만 잔뜩 잡는 마피아의 세계를 그리는 것도 아니다. 볼 품 없는 지방(예컨대 지금은 지명이 없어진 마산 같은 곳)의 한 작은 동네, 거기서도 오토바이 수리점이나 카센터, 철물점 등이 모여 있는, 다소 빈궁하고 비루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치건 일당은 거기서 오토바이를 훔쳐서 돈이 궁한 자영업자들에게 되팔고 고리를 뜯는 일로 살아간다. 치건의 뒤에는 큰 형님(김종수)이 있는데 그래 봐야 동네 유지급 작은 세계의 조폭 두목일 뿐이다.

 

큰 형님은 지역 개발 과정의 이권에 개입하며 그걸 위해 오랫동안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이 될 인물을 키워 왔다. 작은 세계의 범죄이지만 그 룰과 법칙, 과정은 큰 세계, 큰 조직의 범죄, 중앙 정치권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영화는 늘 작은 세상으로 큰 세상을 보여 준다. 그게 맞다. 그게 더 예리하고 정확하며 작은 물이 큰 바다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화란’은 그 정서적 점층법이 좋은 작품이다.

 

 

모두들 송중기와 홍사빈의 연기를 두고 얘기하지만 일부 평자의 눈에는 정재광이 보인다. 혹은 정재광만 보인다.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 준다. 그는 치건 패거리의 2인자로 나온다. 살벌하다. 허구헌날 이자 납부 문제로 린치를 당하는 오토바이 일용 배달꾼 역의 홍서백이란 배우도 좋다.

 

그가 절룩거리며 걸을 때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절룩거리게 된다. 큰 형님 역의 김종수, 중국음식점 주인 역의 정만식 등등 서브 텍스트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한몫한다. 주 조연의 연기가 펄펄 난다. 송중기가 매우 차가운 이미지를 선보인다.

 

그의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할 수 없어. 이건 해야 해. 해야만 하는 거야.” 부드럽지만 비정하다. 가장 무서운 폭력은 친절하고 무서운 법이다. 송중기가 보여 주는 새로운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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