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묘하게도 두 가지 영화를 뒤섞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이고 또 하나는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백 투 더 퓨처’이다. 우주 평행이론과 가족사가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현실 경계를 넘어 이(異) 세계를 오간다. ‘인터스텔라’의 매튜 매커너헤이가 우주 공간을 떠돌듯. 마히토는 또 다른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친 엄마를 만난다. 그건 J 폭스가 ‘백 투 더 퓨쳐’에서 그러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마히토의 엄마는 현실 세계에서 이미 죽은 몸이다.
이 영화를 두고 일부 저널들은 (익명의) 대중들로부터 혹평이 잇따르는 양 다소 과장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 (저널)들은 영화가 불편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런 비평이 오히려 불편하고 지나쳐 보인다.
이들이 영화가 불편하다고 하는 이유는 영화의 서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를 두고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식의 취향이 갈리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중의 이름을 빌어 영화를 매도하는 것은 다소 지나쳐 보인다.
무엇보다 그 혹평의 근거가 1)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했고 2) 아버지가 처제와 결혼했으며 3) 영화가 친절하지 않다는 등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부 저널들은 무엇에 기반해서 이 영화가 일본 제국주의를 두둔했다고 판단하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무작정의 비판은 편견이자 왜곡이다.
아마도 그건 주인공 마히토의 아버지가 군수업체 사장이라는 설정 때문일 것이다. 시대는 1942년, 2차 대전이 한창인 때이다. 일본 군부가 미국 태평양 함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직후이다.
마히토의 아버지 마키(기무라 다쿠야)가 운영하는 공장은 비행기 조종석 덮개를 만들며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마키는 시골 저택 건너에서 어디론가를 향해 가고 있는 수많은 ‘죽음’을 가리키면서 ‘덕분에 자신은 잘 살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마히토는 그런 아버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마히토는 아버지가 보란 듯이 자신을 승용차로 데려다 준 학교에서 등교 첫날부터 아이들의 ‘이지메’에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돌멩이로 자신의 머리를 짓이긴다.
아버지는 학교에 돈을 뿌려 가면서까지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부산을 떨지만 마히토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집 뒤, 거대한 탑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영화는 마히토의 눈을 통해 아버지(세대)의 극악했던 무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태도를 보인다. 다만 그 '톤 앤 매너'가 적극적이고 전투적이지 않을 뿐이다.
영화는 전쟁이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얘기가 중심 테마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얘기인즉슨,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편승한 아버지라 할지라도 아이의 눈에는 ‘아버지는 아버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특히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는 것이다. 시각이 입체적이지 않다고 해서 거기에 이념의 외투를 씌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아버지가 엄마의 동생, 곧 처제와 재혼을 한 것을 두고 마치 불륜 관계를 연상하듯, 이 영화의 불편한 점의 하나로 꼽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 처사다. 처제와의 관계는 상처(喪妻)를 한 이상 불륜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전에 아버지와 이모의 관계가 묘했다는 얘기일까.
영화에서는 그 전사(前史)를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건 근친 관계도 아니다. 당시와 같은 전쟁의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족관계가 파괴되는 바람에 그 굴곡의 삶 과정에서 근친이라 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사람끼리의 결합이 많이 이루어지던 시대이긴 했다.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자신의 죽은 형을 대신해 형수와 동거 후 결혼했다. 그렇다면 앙드레 말로도 불편한가. 시대에 대한 내재적 이해, 공감각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저널이 이런 식의 얘기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 구조가 난삽하고 캐릭터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등 내용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완전히 이해가 불가능한 지경은 아니다. 1942년이라면 미국이 참전하고 본토와 도쿄에 대한 공습이 줄기차게 이루어진 때이다. 이른바 도쿄 대공습의 전초전이다.
이때 미군은 이후 베트남전에서도 사용해 비난을 샀던 네이팜탄까지 퍼부어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독일과 일본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치솟았을 때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 독일의 파시스트들의 만행을 생각하면 그건 일단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마히토의 생모는 이때의 공습으로 죽었다. 마히토는 엄마를 그리워하는데 그의 환영 속의 엄마는 매번 불길에 휩싸여서 애타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히토는 불타 죽은 엄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모이자 새엄마인 나츠코(기무라 요시노)는 엄마와 똑 닮았다는 얘기를 듣지만 마히토는 그런 그녀가 오히려 낯설고 정이 가지 않는다.
마히토는 처음에 나츠코를 딱딱하게 대한다. 나츠코는 마히토를 만나자마자 아이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갖다 대며 여기에 새 생명이 있고 너의 동생이 있다며 가까워지려고 애쓰지만 정작 마히토가 그녀를 ‘이모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모 엄마 나츠코는 임신으로 인해 병이 생기고 아픈 몸으로 누어 머리에 큰 상처가 난 아이를 어루만지며 죽은 언니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며 눈물을 흘린다. 둘 사이는 서먹서먹하다.
시간이 한참을 지나서야, 이(異) 세계 속에서 만난 ‘어린 엄마’ 히미(아이묭)로부터 둘의 관계를 ‘허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서야 新 모자 관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궁극으로는 한 소년이 겪는 마더 콤플렉스와 이에 따른 성장기이다.
시대가 불온하고 불안했을 뿐 그건 어느 시대 어느 누구나 겪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보편성, 일반성은 여기에 있다. 그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후죽순의 수많은 캐릭터와 그 곁가지를 잘 처리하고 정리해 낼 수 있다.
마히토를 탑의 성, 그 깊은 심연으로 인도하는 것은 왜가리이다. 이 왜가리는 자신 몸속에 있는 못생기고 못된, 또 다른 자기의 왜가리를 부리 밖으로 꺼낸 후 아이를 요리조리 데리고 다니며 교활한 행동을 한다. 왜가리는 마히토의 또 다른 자아(얼터 에고 alter-ego)이다.
마히토의 내면은 충돌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이모라지만 아빠가 엄마를 잊고 다른 여자한테 가는 게 싫다. 자신의 머리에 돌을 찧지만 그건 아빠에게 하고 싶은 행동이기도 했다. 이모는 엄마를 너무 닮아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다. 자신도 완전히 엄마라는 존재를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히토가 좀처럼 새엄마에게 곁을 주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마히토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능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안으로 더 들어가려 한다. 아이가 기를 쓰고 높은 탑을 지닌 비밀의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이유이다. 왜가리는 끊임없이 마히토에게 속삭인다. "엄마는 아직 죽지 않았어" "엄마가 살아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왜가리에 이끌려 다가 간 성 앞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마히토는 성 안에서 일본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펠리컨과 잉꼬들의 공격에 시달리지만 결국 어린 엄마 히미의 도움을 받아 ‘(어린) 자신을 죽이고’ ‘(성장한) 자신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다. 잉태의 방에 유폐돼 있는 이모 엄마도 구출해 낸다. 마히토는 어린 엄마와 각기 다른 문, 현실의 문과 죽음의 문을 각자 열고 가까스로 행복하게 헤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요시노 겐자부로의 아동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지만 여기에 하야오 자신의 일대기를 죄다 비벼 넣은 느낌을 준다. 전범국 군수공장 사장 아들이라는 점, 비교적 대저택의 시골에 살았다는 점 등이 그렇다고 전해진다.
전쟁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과 불안이 최고조인 시대였고 어쩌면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하야오는 여전히 삶의 의미와 그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야오는, 그리고 그건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 스스로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성 안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아버지, 태초의 선조 같은 남자는 마히토의 선택을 되묻는다. “혼돈과 혼란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겠느냐?”
미야자키 하야오는 욕된 세상이나마 견뎌내고 지켜내며 늘 새로운 사람과, 그게 바로 이모 엄마 같은 사람이라도, 꼭 나의 친모가 아니더라도, 아버지처럼 시대감각이 둔한, 대책 없는 사람이라도, 다시 사랑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노 감독이 은근히 권하는 삶의 방식을 담고 있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그대들도 이렇게 살지 않겠는가?"이다. 그 질문을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