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효 감독의 신작 ‘3일의 휴가’는 장르상 판타지로 분류돼 있지만 그 내면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사실은 공포영화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05분의 러닝 타임 내내 극장 안에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는다면 세상 최고로 무감각한 냉혈한 소리를 듣거나 적어도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심지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의 돌아가신 엄마가 결국 당신을 버릴 수도 있다. 그건 ‘13일의 금요일’의 아이스하키 복면을 쓴 연쇄살인마에게 쫓기는 꿈만큼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무심한 인간인들 엄마 얘기에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죽은 엄마에게조차 버림받을 정도로 눈물 한 방울 없는 인간이 돼선 안된다고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들어오며 자랐기 때문이다.
영화 ‘3일의 휴가’는 엄마 얘기이다. 그것도 죽은 엄마다. 자신이 임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엄마가, 뒤늦은 죄책감에 빠져 사는 딸아이를 위해 하늘나라에서 3일간 휴가를 받아 자식 곁으로 잠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딸은 엄마를 보지 못한다. 엄마는 살아 있는 딸의 일에 개입하면 안된다. 아이를 만져서도 안 된다. 살아생전 딸은 내내 못되고 모질게 굴었지만 엄마는 죽어서도 그런 딸을 보듬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당신이 안 울 수 있다고?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차라리 공포이다. 모두들 자신의 엄마에 대한 죄책감, 죄의식을 어두운 극장 안에서 새삼 꺼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상효는 2010년 ‘방가? 방가!’와 2012년의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을 만들며 주류 영화계에 안착했다. 그는 그 이전부터 가장 잘 쓰는 시나리오 작가 소리를 들었으며 스스로 개발한 시나리오 작법의 매뉴얼(그는 최근 저서 『이야기 수업』을 냈다)로 영화과 교수 생활을 할 정도였다.
육상효는 어떻게 보면 한국의 로버트 맥키 같은 인물이다. 맥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라기 보다는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을 가르치며 좋은 시나리오와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해 주는 인물이다.
육상효는 자신이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 전 임권택 감독의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임권택의 1996년 영화 ‘축제’가 그가 쓴 각본이었다. 김홍준 감독의 걸작 ‘장미빛 인생(1994)’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김유진 감독의 1995년 영화 ‘금홍아 금홍아’도 그의 시나리오 작품이다.
훗날 2015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마지막 영화 ‘화장’을 각색할 만큼 오랜 기간 영화계의 ‘그림자’로 뛰어난 역할을 많이 했던 인물이 바로 육상효이다.
그가 만든 이번의 ‘3일의 휴가’는 놀랍게도 직접 쓴 시나리오가 아니다. 유영아가 쓴 것을 일부 각색과 연출만 맡은 것이다. 유영아는 ‘국가대표 2’와 ‘82년생 김지영’ 등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영화 및 드라마 작가로 유명하다.
아마도 짐작컨대 ‘3일의 휴가’가 모녀의 얘기이며 딸의 시선과 정서가 강하게 투영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여성성’의 골간을 꾸린다는 건 장년의 남자 감독으로서는 다소 부담이었을 것이다. 유영아가 쓴 섬세한 글의 맛을 육상효는 능숙하고 능란하게 영상으로, 배우들의 연기로 빚어냈다. 환상의 조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3일의 휴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엄마(김해숙)가 여전히 딸 때문에 마음고생을 이어 가는 설정으로 돼 있다. 배경은 경북 김천 시이며 여기서도 조금 더 시골 안쪽으로 들어간 허름한 공간이다.
딸(신민아)은 엄마가 그렇게 생고생을 하면서 키워 냈고 그래서 미국 유학까지 보내 박사가 되게 만들었지만 정작 지금은 엄마의 시골집으로 들어앉아 촌부(村婦)로 살아가겠다는 양 속 터진 일상을 이어 가는 중이다.
이 신식의 촌 아낙네는 어깨너머로 기억하는 엄마의 온갖 가정식 음식을 만들어 스스로 해 먹는다. 가뭄에 콩 나듯 찾아 드는 손님들에게 밥도 팔고 동네의 노인들, 과거 엄마의 이웃들과 같이 나눠 먹기도 한다.
죽은 엄마 유령은 딸의 행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건 동네 이웃 노인들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그들은 딸에게 어여 너의 길을 가라고, 그게 네 엄마가 원하는 것이라며, 아예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 오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3일의 휴가’는 언뜻 설정을 듣거나 외간을 살짝 엿보기만 해도 도무지 2시간 가까운 시간의 에피소드를 이어 가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많을까.
그런데 육상효는 그걸 해낸다. 현실의 에피소드가 떨어질 만하면 딸의 기억을 통해 어머니의 과거가 펼쳐지며 거기에서 또다시 눈물 한 바가지를 쏟게 만든다. 엄마는 딸을 자신의 동생 집에 맡기고 재가 아닌 재가를 했는데 그건 새로운 남자의 두 아이를 키우는 조건으로 자신의 딸이 다녀야 할 학교 교육비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가정부 유모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딸을 자기에게서 떼어 놓은 셈이다. 엄마는 그게 딸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딸은 끝내 엄마의 선택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3일의 휴가’의 진짜 설정은 여기서 나온다. 영화는, 죽은 엄마가 살아 있는 딸을 멀리서나마 재회하는, 그런 단순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딸은 늘 못되고 모질기 그지없으며 엄마는 늘 그런 딸에게 이상하리만큼 쩔쩔매게 된다는 그 고유의 관계 자체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근데 그건 기이한 보편성을 지닌다. 현실에서도, 아니 현실에서는 더욱더 잘 해 주려는 엄마에게 딸은 늘 짜증을 낸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후회를 하는데 그렇게 후회하는 자신 때문에 더 짜증을 낸다. 그래서 또 엄마를 만나서는 또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리고 소리를 친다.
그러지 않는 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딸이 비로소 짜증 증후군에서 벗어날 때는 엄마가 이미 죽은 후이다. 신의 이상한 장난 같은, 인생의 그런 악습의 굴레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식, 딸은 한 명도 없다.
영화는 전 극장 안에 그런 후회의 탄식을 쏟아 내게 만든다. 어떤 관객들은 부끄럼 없이 소리 내어 울기도 한다. 육상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용서도 없이 극한의 신파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한순간도 쉬지를 않는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 그러니 다들 울면서 속죄하라고 몰아친다. 그건 하늘의 명을 받고 매몰차게 밀어붙이는 저승사자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지속적인 톤 앤 매너를 지켜 간다는 점에서 육상효가 얼마나 구전의 기술력이 뛰어난 감독인 가를 보여 준다.
실컷 울고 나오게 한다는 점에서 ‘3일의 휴가’는 극단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모질고 척박한 세상에서, 모두들 (엄마가 가르쳐 준) 삶의 가치보다 사회가 만들어 낸 성공과 성취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진정한 자아의 성숙이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그건 일종의 도덕적 깨달음이다. 세상이 구원받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이다. 세상은 모성의 본질을 아는 자들만이 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3일의 휴가’가 만들어 내는 놀라우면서도 새로운 사회 이데올로기이다.
‘3일의 휴가’는 놀랍도록 극단적인 신파의 영화이다. 그런데 바로 그 극한의 경험이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을 이루어 낸다. 육상효는 여전히 이야기꾼으로서의 구력과 기력이 대단한 인물임을 입증해 냈다. 관객은 수백만까지는 들지 못했다.
이 영화는 관객 수가 중요하지가 않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입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다. 흥행이 대박은 아니더라도 육상효라는 감독의 존재가 새삼 증명됐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작품이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