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
텅 빈 무대 위 수정은 필사적으로 달린다. 성인이 되기 전에 단명할 것이라는 예언을 떨쳐버리려는 듯 모든 불안과 의심, 걱정을 뒤로 한 채 땀이 나도록 달린다. 그녀가 마주했던 악사, 청소부, 눈-인간, 모기-인간, 허수아비-인간, 저승신은 그녀를 응원한다. 그녀는 죽음을 이기고 살아 낼 수 있을까?
5일 경기아트센터에서 경기도극단의 ‘단명소녀 투쟁기’가 관객을 만났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둥그런 흰 무대에 막이 오르자 교복을 입은 19살 고등학생 '수정'이 등장한다. 대학 입시에 몰두해 있는 여느 고등학생과 같은 수정은 어느 날 예언가를 찾아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묻는다. 대학에 합격할 것인지, 재수를 할 것인지. 그녀가 들은 말은 ‘대학보다는 20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것이었다.
현호정 작가의 ‘단명소녀 투쟁기’를 원작으로 한 극은 자신의 단명에 대한 예언을 극복하려 친구 ‘이안’과 저승으로 모험을 떠나는 19살 소녀 ‘수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 ‘단명소설 투쟁기’는 2020년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를 받아 제1회 박지리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나가는 것처럼 ‘수정’의 모험은 난관이 가득하다. 적인 악사, 청소부, 눈-인간, 모기-인간, 허수아비-인간을 물리치고 자신과 함께한 친구 ‘이안’까지 죽여야 한다. 명부에 적힌 사람들을 죽여야 수명을 얻을 수 있다는 저승신의 조건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대 역시 신화적 요소가 가득하다. 수정이 만나는 적들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색동옷을 입거나 부적을 달고 승복을 입은 모습들은 전통 신화 속 영적인 존재를 표현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이들의 낯설지만 우리와 같은 모습을 표현한다.
무대 연출 역시 신비롭다. 저승으로 향하는 여정에 흰 천이 등장해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등장인물의 위엄 있는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강아지 ‘내일’이 함께 해 수정의 조력자가 되어 주고, 친구 ‘이안’은 수정에게 용기를 북돋으며 그녀의 삶을 지지한다.
극단 비평가 전강희 드라마터그는 ‘제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를 죽여라’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예로 들며 주인공 수정의 여정이 자기 자신을 이기고 성장하며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이와 같음을 강조했다.
김광보 연출은 전강희 드라마터그와의 인터뷰에서 “‘단명소녀 투쟁기’가 기존의 청소년극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사회적으로 역경을 이겨낸 이야기라기보다는 청소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라며 “어떤 대상들을 만났을 때, 그 대상을 죽이고 다음으로 가는 것, 즉 내면의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 경기신문 = 고륜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