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해안가 간척 어려워 '거지방죽'으로 불리다…인천 서구 ‘한들방죽’ 터
인천 서구 백석동 인근으로 한들방죽 터가 있다. 백석동은 한들마을이나 한둘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백석(白石)은 한뫼산’으로부터 유래됐다. 한뫼산은 지금의 할메산이다. 백석동 이곳을 비롯해 서곶과 검단 등 해안가의 마을은 예전에 대부분 갯벌이었다.
한들방죽은 조선후기 혹은 20세기 초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1911년 근세오만분의일지형도에 이미 한들방죽 제방 모습이 있다. 1916년 지형도에도 한들방죽 안쪽에 새로운 제방을 세우고 저수지를 만든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천천 하류 일대는 버려진 땅으로 남아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송병준이 조선총독부로부터 경기도 부평군 모월곶면 백석리 일대의 국유미간지를 비롯해 시천리, 검암리 일대의 947801.65㎡(28만 6710평)의 갯벌 간척 허가를 받았다.
이에 일제의 후원을 받아 자본을 대 1919년 완공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대표적인 간척 사업이었다. 간척에 성공한 후 송병준은 투자액의 몇십 배에 달하는 재산을 불렸고, 서곶 사람들은 그의 소작인으로 일했다.
1914년 일제는 부군면을 통폐합했다. 한들방죽은 같은해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과 통합해 부천군 서곶면이 됐다. 1940년 4월 1일 인천부에 편입될 때 일본식 지명인 운요오쪼(雲揚町)이 되기도 한다. 이는 1875년 운요호 사건의 군함에서 유래됐다.
한들방죽에는 주민들 사이에서 설화가 내려온다. 서해안 일대에 간척 사업이 한창일 때 공사 책임자가 밀물과 썰물로 인해 무너지는 둑 때문에 고민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스님이 사람을 희생시켜야 쌓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인부들이 밥을 먹는데 거지 ‘장쇠’가 공사장에 다가와 음식을 구걸했다고 한다. 장쇠가 쌀밥과 고기반찬을 정신없이 먹고 있을 때 그를 밀어 구덩이에 떨어뜨리고 돌과 흙으로 메워 버렸다. 그런 장쇠를 위해 제사를 지냈고, 이는 거지방죽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됐다.
한들방죽 일대는 여전히 한들방죽들 등 예전의 이름이 남아있다. 하지만 주변 개발로 인해 이전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 경기신문 / 인천 = 김주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