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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 길에서, 길을 찾습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걷지만 우리는 어제의 우리가 아닙니다. 어제 걸었던 산책로를 오늘 다시 걷습니다. 길은 산과 도시의 경계를 가르며 구부정하게 누웠습니다. 누운 길의 꼬리를 밟으며 머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무리 걸어도 길은 쉬 머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발은 길에 있지만 눈은 도시에 머뭅니다. 철야에 지친 간호사처럼 도시는 식곤증에 취했습니다. 그림자를 늘어뜨린 빌딩 숲이 어깨를 움츠립니다. 조각공원에 늘어선 조각상들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것 같습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흐르지만 시간은 어제의 시간이 아닙니다. 어제 걸었던 골목길을 오늘 다시 걷습니다. 골목은 집과 집 사이를 서성거리는 길 잃은 아이 같습니다. 도시의 골목에는 한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습니다. 열기가 빠져나갈 틈이 도시의 밑바닥에는 없습니다. 며칠째 계속되는 열대야로 도시의 밑바닥은 절절 끓습니다. 반지하 단칸 셋방 창문들이 발밑에서 나란합니다. 하늘을 향해 열려야 할 창문들이 골목에 갇혀 굳게 닫혔습니다. 에어콘 실외기에 매달린 호스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만나는 사람 또한 어제의 사람이 아닙니다. 맞은편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사내가 다가옵니다. 말쑥한 차림새에 질질 끌리는 슬리퍼가 생뚱맞습니다. 사내의 슬리퍼 곁에서는 다리가 짧고 몸통이 긴 개가 분주합니다. 새끼를 낳았는지 개의 젖이 잔뜩 불었습니다. 불은 젖 때문에 짧은 다리가 더욱 짧아 보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늘어진 젖꼭지가 좌우로 흔들립니다. 흔들리면서도 길을 향해 나아감을 멈추지 않는 건 개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걷는 속도와 방향 또한 어제의 그것이 아닙니다. 보행기를 밀고 걷는 노인의 속도와, 전동 스쿠터에 올라탄 아이의 속도와, 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하는 운전자의 속도는 제각각입니다. 방향 또한 그와 같아서, 누군가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누군가는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고, 또 다른 누군가는 비상등을 깜빡이며 유턴합니다. 제각각인 속도와 방향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신호등입니다. 멈추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 말입니다.

 

걸었던 길을 다시 걷습니다. 걸었지만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걷지만 우리는 어제의 우리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겐 더딘 시간이 누군가에겐 쏜살같습니다. 느리던 빠르던 상관 없습니다. 여름을 나는 건 가로수에 매달린 매미만이 아닙니다. 여름을 나야 하는 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름을 등에 지고 길을 나섭니다. 저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찬란한 슬픔이 기다릴지, 빛바랜 기쁨과 마주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길을 나설 수밖에 없음은 저기에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길에서 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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