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동지역 한글학교 협의회가 개최한 '2024 한국어 교사 학술대회'(9/20-9/22)에 다녀왔다. 필자는 이 학술대회에서 ‘재외동포 차세대 교육의 혁신과 미래 : 미래 글로벌 생태와 차세대 정체성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했다. 떠나온 모국 밖에서 자신의 삶과 미래를 헤쳐 나아가야 하는 재외동포 차세대들은 그들 부모 세대가 견지했던 정체성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더 확장된 정체성, 더 고양된 정체성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시민 정체성은 세계의 시공(時空)에서 자아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의미 있는 성취를 향하게 한다.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그냥 세계 무대에서 세속적 성공을 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일종의 범(汎)도덕성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세계인의 공동 발전에 나의 참여를 다짐하는, 그런 정체성이다. 세계를 떠받치는 선한 가치를 세계 시민으로서 내가 실천하며 살겠다는 의식, 그런 정체성이다. 건강한 세계 시민이라면 문화 다양성이 넘쳐나고, 초 긴밀(hyper connective) 네트워킹으로 기존의 경계들이 해체되고, 지구의 위기와 새로운 갈등이 세계인 모두의 문제로 와닿는, 그런 글로벌 생태에서 세계와 나를 지속 가능하도록 발전시키려는 정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나라 밖 지구촌 재외동포들의 차세대는 세계의 시간과 공간에서 자아의 정체성을 더 긍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한인의 세계와 세계인의 세계가 서로 호응하고 선순환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국내의 차세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웅크리지 말고, 숨지 말고, 세계의 무대로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 일본에서 우리 동포 차세대들이 살아갈 글로벌의 조건들을 내다보면서 이런 자각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세계 180여 개국에서 살아가는 730만 재외동포 중에서도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마음 안에 짊어지고 있는 정체성의 그늘은 흐려 보였다. 나를 드러내는 쪽보다는 ‘숨고 싶은 나’의 모습이 짙다. 그것은 우리가 일본에 강점되었던 불행한 역사에서 빚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제국주의 일본에 끌려갔던 우리 동포들은 해방이 되고서도 부득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자신이 한인임을 밝히는 것을 망설인다. 그 땅에 사는 한 차별과 소외가 짙게 드리워져서, 숨기고 싶은 마음이 일종의 사회‧문화적 유전자처럼 자리 잡은 탓이리라.
남북의 분단과 이념 대립은 일본 땅에 사는 동포들에게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거류민단’과 ‘조총련’으로 구별되는 동포들 간의 분화된 이념적 정체성은 서로의 정체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도록 만들었다. 1980년대 이후 일본에 이주해 간 새로운 세대의 동포들(New Comer로 지칭함)은 해방 전부터 일본에 살아왔던, 이전 세대들과 사회 문화적 가치가 달랐다. 서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체성의 간격이 생기면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대 차이라기보다는, 미래를 향하는 시선의 차이, 역사적 정체성의 차이로 읽힐 때가 있다.
동포 사회가 3~4세대로 내려오면서 일본인과 결혼하는 일도 많아졌다. 동포 청소년들에게서 부모 중 한 사람이 일본인인 경우는 늘고 있다. 이는 디아스포라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세계 어디서나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일본의 우리 동포들은 이를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접하는 일본인 주류 사회를 향해서도 그러하고, 우리 동포 사회 내부를 향해서도 그러하다. 짐작해 보면, 그 아픈 속내를 이해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이런 동포들은 동포로서의 정체성을 조용히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숨어서 지내고픈 마음’은 동포들의 정체성에 동력을 떨어뜨린다. 나를 드러냄으로써 밝은 성취동기로 이끄는 데에 세계 시민성이 있다. ‘숨어서 지내려는 마음’을 몰아내고 당당하게 나를 드러낼 수는 없을까. 무엇이 이 동포들을 숨도록 만드는가. 바로 여기에 동포 차세대 정책의 근간 핵심이 있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