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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 함께 굴러가는 겨울

 

새벽이 열리면 산에 오릅니다. 오른 산에는 벌써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들뜬 눈동자들이 한 곳을 바라봅니다. 저물었던 해가 산 너머에서 다시 떠오릅니다. 지고 뜸과 상관없이 해는 같은 해입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라는 믿음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조차 헌것과 새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믿음은 진리보다 쉽게 전염되어서 돌이키기 힘듭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는 믿음, 그 믿음에 전염된 사람들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나 또한 전염된 눈빛을 다독이며 같은 방향으로 향합니다.

 

산인지, 오름인지, 새로움인지, 태양인지..... 분명치 않은 대상을 향해 사람들은 해묵은 마음의 짐을 벗어 던집니다. 벗어 던진 짐들이 바윗덩이가 되어 산비탈을 굴러 내려갑니다. 오르다 오르다, 끝내 굴러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의 바윗돌 같습니다. 어쩌면, 시지프의 바위는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헛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쇠똥구리를 보면서 느낀 부끄러움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굴리는 방향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뒷발로 쇠똥을 굴리는 녀석과 나는 닮았습니다. 녀석과 내가 이르고자 하는 삶의 정상은 몇 덩이의 쇠똥을 굴려야 도달할 수 있을까요.

 

굴리고 또 굴린다고 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는 할까요. 설혹, 그렇게 굴리고 또 굴려 정상에 오르면 무엇이 남을까요. 머물 수 없어 다시 지상으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시지프의 바위처럼, 도시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건 아닐까요. 그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애써 기어오르는 것은 반항의 몸짓일지 모릅니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밝혔듯이, 한없이 올라도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부조리에 대한 반항 말입니다. 쉼 없이 바위를 굴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영원한 노동은 부조리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명명백백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뮈는 세상에 만연한 온갖 부조리로부터 세 가지 대안을 끌어냈습니다. 자유와 반항과 열정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의식의 활동을 통해 죽음으로의 초대를 삶의 법칙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라고 선언합니다. 생각의 깊이가 얕은 나로서는, 카뮈의 철학적 사유(思惟)를 헤아리기 힘듭니다. 그의 책을 읽고도 부조리로부터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오기 비슷함입니다. 끝없이 추락해도 기어코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바위 같다고나 할까요.

 

쓰고픈 건 많은데 녹여내지 못합니다. 쓰지 못함의 정체는, 씀의 안쪽에서 흘겨보는 곁눈질입니다. 흘겨보는 눈빛으로도 상처를 입는구나. 신발 끈을 고쳐 맬 때마다 손톱 밑이 아립니다. 내 안의 내가 등을 돌리고 서서 눈을 흘길 때, 날 선 칼이 바짝 목을 겨눕니다. 서둘러 길을 나서지만 겨눈 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진 못합니다. 까만 하늘에 걸린 은하수가 무색합니다. 오래 걷고 멀리 걷습니다. 걸음은 길과 길을 따라 정처 없이 이어지는데, 길의 모양새는 반듯하지 못하고 꾸부렁거립니다. 꾸부렁길의 끄트머리는 어김없이 산길로 이어집니다.

 

어제 올랐던 산을 오늘 다시 오릅니다. 오르는 내내, 미움이라거나 상처 같은 것들을 산 밑으로 굴려 보냅니다. 겨울도 함께 굴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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