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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in 수원] "대한독립 만세"…106년전 그 날, 수원을 달군 독립 의지와 기개

김세환, 독립·민족운동 교육·체육 발전 헌신 광복 직후 서거
수원 지식인들 방화수류정서 횃불시위 ‘점화’, 20회 만세운동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항거, 수원 1919' 및 서거 80주기 사업

 

106년 전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 모두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만세운동의 시작일이다. 총칼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독립을 열망한 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음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겨야 하는 기회다.

 

당시 만세운동은 수원에서도 격렬하게 이뤄졌다. 기미년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가한 핵심 인사를 일컫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인 김세환(1889~1945)이 수원 만세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도화선은 한 달간 20여 회에 달하는 만세운동이 이뤄지게 했다. 1919년 수원과 김세환의 업적, 이를 기억하는 수원시를 확인해 본다.

 

 

◇수원 독립과 근대 교육의 정신적 지주, 김세환 선생

 

김세환은 수원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교육과 체육 발전에 56년의 삶을 헌신했다. 이후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건국훈장 중 독립장 이상을 받은 인물은 1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특히 국가보훈부가 지난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할 만큼 공로를 높이 인정한 자랑스러운 수원 출신 인물이다.

 

김세환은 1889년 11월 18일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242번지에서 태어났다. 팔달문 북쪽에 자리 잡은 지금의 팔달로2가 그의 고향이다.

 

기독교가 전파되던 당시 수원에도 1901년 성 안에 감리교회(북수동 수원 종로교회)가 들어섰다. 소년 김세환은 집에서 가깝던 이 교회를 통해 신앙뿐 아니라 교육과 구국 활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후 그는 서울에 있는 관립 외국어학교로 진학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수원으로 돌아온 그는 1910년부터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중·고교 전신)에서 직조 감독관으로 일하며 시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들을 길러냈다.

 

1913년부터는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감으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양잠 기술을 가르치고 교사 증축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등 학교 살림을 도맡았다고 전해진다.

 

학교 증축 당시 건물에 한반도 지도를 조각해 붙이고 장마철 수원천을 건너기 불편했던 학생들을 위해 다리를 놓은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도 많은 사람이 오가는 삼일교가 바로 그 자리다.

 

독립운동 열기가 고조되면서 1919년 2월 김세환은 YMCA 간사였던 박희도(민족대표 33인)를 통해 3·1운동 준비 모임에 동참하게 된다.

 

 

수원과 충남 지역의 조직 책임자로 중추적 역할을 하며 각 지역 교회의 주요 인사를 만나 동지들을 규합했다. 다만 3월 1일 서울로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져 독립선언서에 기명하지 못했고 당일 만세운동에 참여해 서울에 머무르던 중 3월 1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김세환은 법정에서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속 운동할 것인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약 1년의 옥고를 치른 김세환은 1920년 10월 석방돼 수원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간섭으로 교사로는 복직하지 못하고 시내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과 지역 유지로서의 활동을 펼쳤다.

 

화성학원과 삼일학교 및 종로교회를 근거로 활동하며 후학양성과 수원지역 교육계를 위해 헌신하던 그는 1945년 광복 42일 만인 9월 26일 수원읍 남부정 201번지(현 매교동)에서 운명했다.

 

 

◇1919년 3월, 들불처럼 번진 수원 만세운동

 

수원군 3·1운동은 김세환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기미년 수원군에서는 3~4월 21차례의 만세운동이 이어졌는데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김세환의 제자, 후배였다.

 

김세환은 1919년 2월 말 수원 만세 시위를 위한 최종 준비 회의를 수원상업강습소에서 열고 제2회 졸업생인 김노적을 수원면 만세 시위 동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의 계획은 삼일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원시내를 거쳐 화성학원까지 만세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를 감지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실행하지는 못했다.

 

이를 대체한 저녁 횃불시위는 수원지역 지역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919년 3월1일 저녁 수원군 수원면 방화수류정 부근. 김세환의 지시로 김노적, 박선태 등 교사와 학생들,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인 등 수백 여명이 횃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 저녁 시작된 횃불시위는 수원군 전역으로 퍼진 격렬한 만세운동의 시작점이었다. 보름 뒤인 16일 수원면 서장대와 연무대에서 수백 명의 시위대가 만세를 부르고, 21일 동탄면 오산리에서 평화적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4월3일 우정면과 장안면에서는 2500명의 군중이 모인 수원군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군중들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식민행정 서류를 불태우고, 화수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일제의 총탄에 맞섰다.

 

 

◇106년이 지난 현재,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수원

 

시는 광복 80주년과 김세환 서거 80주기를 맞아 김세환의 업적을 기리고 수원지역 만세운동을 기억하고자 행사와 전시를 진행한다.

 

광복 80주년, 3·1 운동 106주년 기념 특별기획 '항거, 수원 1919'라는 제목의 전시는 1919년 3월1일 방화수류정 횃불시위를 시작으로 울려 퍼진 만세운동의 함성을 조명한다.

 

 

지난 1일에는 수원박물관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106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려 그날의 함성을 재현했다. 

 

독립 열사들을 위한 묵념과 학생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 및 만세삼창 등 공식 기념식에 더해 김세환 서거 80주기 헌화소를 운영해 의미를 더했다.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재준 수원시장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수원의 독립운동가와 민중의 이야기를 시민과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함께 새로운 희망을 품고 행복으로 가는 길일 것"이라며 "수원의 독립운동가와 민중을 시민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며 존경하겠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장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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