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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 왕이 되고 싶었던 모기

 

안과 밖이 있다. 창(窓)도 그렇다. 안에서의 창은 보기 위함이고 밖에서의 창은 가리기 위함이다. 보거나 혹은 가리거나, 얇은 유리창의 존재 이유조차 안팎으로 서로 나뉜다. 볼 것인가, 가릴 것인가. 결정은 내가 아니라, 내가 딛고 선 땅이 한다. 아니, 나와 함께 딛고 선 무리의 그늘이 한다. 이를테면, 학벌과 벌이와 행색과 씀씀이가 결정한다. 버려지는 명함과 살아남는 명함이 결정한다. 창의 존재 이유는 그렇게 나뉜다.

 

누군가 그랬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읽거나 듣고도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늘 문득 오줌을 누려다 창을 느꼈다. 아니 눈으로 읽히는 창을 보았다. 사내들이 서서 오줌을 누는 소변기에는 사내들만 아는 문양이 있다. 오줌발이 떨어지는 절묘한 각도에 새겨진 파리 한 마리가 그것이다. 파리는 연약한 생명이나 수천수만의 오줌발을 견디며 꿈쩍도 없다. 견뎌내는 모양새가 폭포수를 견디는 도인의 그것 같다. 그런데 오늘 만난 도인은 조금 달랐다.

 

길게 세워진 네모난 창에 모기가 있었다. 모기는 네모난 창처럼 길게 세워진 새하얀 소변기 속에 있었다. 소변이 낙하하는 절묘한 지점에 모기는 흡사 파리처럼 날개를 접고 있었다. 온갖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도를 닦겠다는 듯 모기의 어깨는 으쓱했다. 나는 으쓱한 모기의 어깨에서 파랗게 새겨진 왕(王)자를 발견하였다. 뭐지? 싶어서 오줌 누기가 저어했다. 저어한 마음 끝에 바지 지퍼를 내리다 말고 모기를 관찰했다. 어디서 보았을까, 낯이 익었다.

 

모기는, 모기 세상을 주름답다 쫓겨난 바로 그 모기였다. 모기의 퇴출은 곤충법(昆蟲法)에 의한 것이었으나, 퇴출에 감춰진 진실은 모기 아내의 주술(呪術) 때문이었다. 모기 아내의 주술 행위는, 그러니까 ‘위잉’하며 날개를 파닥이는 짓은 사뭇 요란했다. 요란한 주술 뒤에는 피를 빨린 사람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쫓겨난 모기가 모기 세상을 떠나 냄새나는 사각의 창에 나타났다. 파리를 제치고, 이 구역의 왕초가 되겠노라 날개를 접었다.

 

그가 왕초 노릇을 하든 말든 관심 없다. 내가 기분이 상한 것은 그가 수천수만의 오줌발을 견뎌내는 파리 흉내를 내는 것이다. 흉내가 그의 특기인지는 몰라도 흉내를 낸다고 해서 모기가 파리가 될 순 없다. 나는 망설이던 바지 지퍼를 완전히 내렸다. 모기 한 마리를 향한 응사치고는 과했지만 기분은 명확했다. 단 한 번도 정확히 조준당한 적 없던 자를 향한 정당한 발사였다. 모기는 교묘한 비행으로 피한 듯했으나 끝내 추락했다. 나는 추락한 모기 잔해를 향해 남은 실탄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안은 좁고 밖은 넓다. 창도 그렇다. 사람들은 창안에 서서 창밖을 본다. 좁은 곳에 서서 넓은 곳을 지향한다. 나아가고자 함은 넓음이지만 나아갈 수 있는 창의 크기는 좁다. 물러나도 비켜서도 네모난 창의 세상은 한결같다. 열거나 닫아도 마찬가지다. 창은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지만, 나 자신을 멈추게도 한다. 나아가려면 창문부터 닫아야 한다. 창을 닫고 방을 나설 때,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 창밖에 서면, 창안의 세상조차 창밖의 일부다. 창밖의 모기가 귀찮다고, 굳이 스스로를 창안에 가둬둘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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