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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희의 향기로운 술 이야기] 우리만의 포도주를 찾아서 – 산머루 향에 깃든 전통의 술

 

가을이 오면 시장에는 알알이 영근 포도가 넘쳐난다. 오늘날에는 캠벨얼리, 샤인머스캣 같은 품종이 흔하지만, 과거의 포도는 귀한 과일이었다. 귀한 손님을 접대하거나 약재로 쓰였으며, 쌀과 함께 빚은 ‘포도주’는 더욱 특별한 술이었다.

 

우리나라 포도주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540년 김유의 '수운잡방'에는 두 가지 제조법이 기록돼 있다. 하나는 멥쌀로 죽을 쑤어 밑술을 빚고 덧술할 때 포도가루를 넣는 방식, 또 하나는 포도즙과 찹쌀 죽, 누룩을 함께 발효하는 방식이다. 당시 사용된 포도는 산머루로 당도가 낮고 신맛이 강했지만, 쌀로 부족한 당을 보완한 옛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산림경제', '임원십육지', '농정회요' 등에도 다양한 주방문이 전하며, '동의보감'에는 “산포도로도 술을 빚을 수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문학 속에서도 포도주는 등장한다. 고려 말 문인 이색은 '목은집'에서 포도주가 화려한 잔치 자리에 오르는 장면을 노래했고, 안축은 '근재집'에서 시골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세월을 보내는 풍경을 읊었다. 비록 제조법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이러한 문학적 단편들은 포도주가 고려 후기 사회에서 이미 귀한 술로 여겨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럽의 와인이 포도의 자연발효에 집중했다면, '수운잡방'의 포도주는 쌀과 누룩을 이용한 두 번 빚는 이양주법(二釀酒)과 융합된 독창적 방식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500~600년 전부터 고유한 방식의 와인(포도주)을 빚어왔음을 보여준다. 고려 충렬왕 시기 원나라에 포도주를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은, 이 술이 단순한 음료가 아닌 외교적 의미를 지닌 귀한 선물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포도는 산머루로, 알이 작고 떫으며 신맛이 강했지만 귀하게 여겨졌다. '동의보감'에는 포도가 열을 내리고 피를 맑게 한다는 효능이 기록돼 있다.

 

근대 이후 서양 와인의 유입으로 포도주는 외래 술로 인식되었으나, 최근에는 전통 포도주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일부 양조장은 쌀·누룩·포도를 함께 발효하는 옛 방식을 복원하고 있으며, 지역 농가 역시 체험 프로그램과 상품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세계는 지금 로컬 와인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프랑스 보르도처럼 특정 지역과 결합한 포도주는 그 자체로 문화가 된다. 고려의 왕이 마시고 조선의 양반이 빚던 전통 포도주를 현대적으로 되살린다면, 그것은 단순한 술을 넘어 소중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포도가 무르익는 이 계절, 한 모금의 포도주 속에서 우리 역사의 시간과 이야기를 함께 음미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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