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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광통교 기둥의 글씨와 풍수

 

청계천을 복개해 도로로 만드는 공사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시작됐지만 미완으로 끝난 채 광복을 맞이했다. 1958년 6월에 재개됐고, 도성 안의 구간이 1960년 4월에 끝나면서 원행을묘 백리길의 행차가 건넜던 광통교도 묻혔다. 40여 년 후인 2003년 7월에 이명박 서울시장의 주도로 청계천의 복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2005년 10월에 완료하면서 광통교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많은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서쪽 150m 지점으로 옮겨 복원했다.

 

복원된 광통교의 길이가 지금의 청계천 폭보다 짧다. 청계천이 옛날보다 넓게 복원됐기 때문이다. 광통교의 밑으로는 청계천의 맑은 물이 사시사철 일정하게 흐르는데, 그 양이 생각보다 많다. 한강의 물을 24시간 일정하게 퍼 올려 흘려보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옛날 청계천의 평상시 물은 지금보다 적었다. 자연 상태의 물을 그대로 유지하려 고집했다면 도심 속 휴식의 공간으로서는 좀 아쉬웠을 것 같다. 지금의 청계천 모습이 좋다.

 

광통교의 기둥 아래쪽에는 庚辰地平(경진지평), 癸巳更濬(계사갱준), 己巳大濬(기사대준) 세 개의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경진년(1760)에 청계천의 바닥을 평평하게 했다”, “계사년(1773)에 청계천의 바닥을 다시 파냈다”, “기사년(1869)에 청계천의 바닥을 크게 파냈다”란 뜻이다. 글씨를 기둥 위도, 가운데도 아니고 아래에 쓴 이유는 그 글씨가 모래에 묻히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경진년(1760)의 준천(濬川) 작업은 매우 유명하다. 당시로서는 워낙 대공사였기 때문에 영조가 몇 년의 토론과 장고 끝에 내린 결정이며, 단순히 하천의 바닥에 쌓인 모래와 자갈만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제방 쌓기,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꾸기, 주변 산의 나무 보호하기 등 모든 측면에 걸친 하천 정비작업이었다. 게다가 본류인 청계천뿐만 아니라 사방의 산과 산줄기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지류까지 정비하는 총체적인 사업이었다. 의무적으로 차출된 서울 거주 백성 15만 명과 임금을 주고 고용한 5만 명 등 연인원 총 20만 명이 동원되고 57일이나 걸려서 공사를 끝냈다. 영조는 공사를 끝낸 후 전 과정을 정리해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는 책을 편찬하고 준천사(濬川司)라는 상설기구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수도 서울의 도성 안 하천 정비작업은 불규칙적이긴 하지만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시행됐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문명권이나 국가의 수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은 현상이다. 산과 산줄기가 저 멀리 물러간 평지, 언덕이나 산 위에 도시의 핵심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는 왜 그랬을까?

 

조선에서는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주산-좌청룡-우백호-안산의 산과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를 택해 수도 서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큰비가 내릴 때마다 사방의 산과 산줄기의 급경사에서 많은 흙과 모래와 자갈이 쓸려 내려와 모이고, 비가 잦아들면 분지 가운데 평지의 하천에 많은 모래와 자갈이 퇴적됐다. 그렇게 하상이 낮아지면 큰비가 내릴 때마다 범람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때때로 준설을 포함한 하천 정비작업을 해주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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