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동 영 민주평화당 대표 경기·인천지역의 1천600만 시민을 대변하는 경기신문의 창간 1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경기신문은 지난 2002년 창간 이후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하에서도 인천·경기지역의 대표적인 일간지로 빠르게 성장해왔습니다. 이는 지역민들의 믿음과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과 신뢰는 바로 ‘시민우선’, ‘경기발전’, ‘언론창달’이라는 경기신문의 사시(社是)와 그 사시(社是)를 실천하고자 노력해온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지역발전을 넘어 국가 발전 및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하는 언론, 시대 보편의 가치를 올곧게 지키며 시대의 오늘을 바르게 비추는 더 큰 창이 되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경기신문 창간 17주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경기신문이 앞으로도 모든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경기·인천 시민들의 신뢰를 받는 최고의 언론사로 성장·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손 학 규 바른미래당 대표 경기신문 창간 1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02년 ‘경기·인천지역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언론의 사명을 다 한다’고 다짐하며 지령 1호를 발행한 경기신문이 어느덧 17주년을 맞았습니다. 열정과 정직함으로 독자 중심의 신문을 만들어가고 계신 경기신문 임직원 여러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수도권은 대한민국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특히 경기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삶의 터전을 꾸리고 있는 한민족의 중심입니다. 경기도의 힘, 경기신문은 수도권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에 미친 공로를 높이 인정받고 있으며 각계각층의 작은 목소리도 놓치지 않는 언론으로서 그 명성이 높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한 독자의 눈과 귀가 돼 다양한 소식들을 진실하고 공정하게 담아내어 독자들을 위한 살아 숨 쉬는 신문을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황 교 안 자유한국당 대표 경기신문 창간 1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경기신문은 지난 2002년 창간 이후 경기도와 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소중한 기록을 쌓아 왔습니다. ‘시민우선·경기발전·언론창달’의 가치 아래 지역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임직원 여러분께 존경과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언론 미디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하루에도 수만 건의 기사가 생산되고 전송되고 있습니다. 정보의 범람으로 오히려 혼란을 느끼는 독자도 늘고 있습니다. 선별되고 믿을 수 있는 기사를 제공하는 올바른 언론의 역할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는 까닭입니다. 지난 17년 동안 경기신문은 신뢰를 주는 좋은 기사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정보의 옥석을 가려 양질의 기사를 많이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역의 생생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며 지역 발전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도 보다 큰 역할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해 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기신문 애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해찬입니다. 경기·인천 지역을 대표하는 경기신문의 창간 1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시민우선’, ‘경기발전’, ‘언론창달’이라는 사시를 바탕으로 헌신하신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경기신문은 2002년 창간 이후 경기·인천 지역 내 각계각층의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지역민들과 소통하며 믿음과 신뢰를 쌓아왔습니다. 점차 다원화되고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역 사회의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경기 지역 내 대표적인 일간매체로서 지방문화 정착에도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역사의 대전환기를 맞아 대한민국의 새로운 100년을 바라보는 더 큰 창을 내고, 국민과 국가를 위해 정론직필의 초심을 이어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창간 17주년을 축하드리며 지역 주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언론으로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
문 희 상 국회의장 안녕하십니까. 국회의장 문희상입니다. 경기신문 창간 1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비롯한 경기신문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경기신문을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애독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기신문은 2002년 6월 15일 창간 이래 ‘시민우선’, ‘경기발전’, ‘언론창달’이란 사시를 바탕으로 경기·인천지역의 1천600만 지역민을 대변해왔습니다. 경기신문은 인천·경기지역의 중요한 언론으로 지역민들의 믿음과 신뢰를 구축하며 올바른 지방문화를 정착시켜 왔습니다. 앞으로도 지역 발전을 넘어 대한민국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하는 언론이 돼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시대 보편의 가치를 올곧게 지키며 시대의 오늘을 바르게 비추는 깨끗한 거울이 돼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창간 17주년을 축하드리며 경기신문 임직원과 애독자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소망합니다.
‘아이스크림’원조(元祖)를 자처하는 나라는 여럿 있다. 이탈리아도 그중하나다. “로마시대 네로 황제가 시칠리아섬 에트나산 정상에서 가져온 만년설에 과일 등을 섞어 먹은 것이 최초의 아이스크림 기원”이라 주장하고 있어서다. 그런가하면 그리스 사람들은 기원전 5세기에 눈가루에 꿀을 섞어서 먹었다며 원조를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이것을 아이스크림이라기 보다는 셔벗의 원조에 가깝며 2세기경 우유와 쌀을 얼려서 혼합해 만든 아이스크림을 먹은 자신들이 원조라 주장한다. 아이스크림을 얼음이라는 의미의 ‘글라세(Glace)’라고 부르는 프랑스도 원조격에 낀다.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다. 1774년 루이왕가의 요리사 ‘제랑드 티생’이 최초로 우유와 크림을 사용하여 아이스 디저트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후 아이스크림은 200년 동안 부유층의 전유물로 이어져 왔다. 그러다 1851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제이콥 푸셀’이 남는 크림은 얼려서 보관하면서 대중화되었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만국박람회에선 와플 장수와 아이스크림 장수가 공동으로 와풀에 아이스크림을 담은 콘을 선보였고 곧바로
2014년 /최문자 2013년 다음에 2015년이었으면 좋겠어 오늘도 어김없이 건초 더미 사이로 2014년이 보인다 (………) 삶과 죽음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 죽음은 죽자마자 눈을 더 크게 떠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뭉텅뭉텅 사라지는 중이었고 나는 왼쪽 폐 반을 자르고 진통제 버튼을 계속 누르다가 살아나는 게 무서워 함부로 하나님을 불러냈다 매일매일 새까만 풀씨가 날아와 물에 젖고 차가운 흰 꽃이 피고 미숙하고 슬픈 기사처럼 함부로 시계바늘을 돌렸다 절벽과 산맥을 넘다 밤늦게 돌아와 미래가 적힌 달력을 찢었다 - 시집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 2019·민음사 어디에 도착했다는 것은 어디선가는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처럼 가장 지우고 싶은 시간은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살아나고 그 자리에 예기치 못한 꽃마저 피어난다. 생애의 절벽과 산맥을 넘어 어디론가 돌아온다는 것 혹은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허허로우며 찢고 싶은 미래인가. 시인이 들여다 본 카이로스의 시간, 지금과 겹칠수록 그의 시가 누군가의 영혼 속에 유영하고 있음을 시계바늘처럼 느낀다. 슬
지난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조도면 부근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로 304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패키지 상품으로 여행중인 한국인 33명(패키지 관광객 30명, 인솔자 1명, 현지 가이드 1명, 사진작가 1명 추청)이 탑승한 유람선 ‘허블레아니’가 침몰해 많은 한국인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상황이다. 이처럼, 잊을만하면 터지는 해상 참사에 대해 온 국민은 슬픔에 잠겼으며, 국·내외 여행, 체험을 막론하고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고 있으며, 최근 발생한 헝가리 유람선 참사에 대해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조사를 위해 촉각을 다투고 있다.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헝가리 유람선 참사의 원인으로는 대형 크루즈선과의 충돌, 유람선 구명조끼 미배치, 미착용, 악조건인 기상상황을 들고 있다. 이날, 기상여건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관광객이 선체 내부에서 구명조끼 미착용 상태로 있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사고의 원인을 언론을 통해 듣다보면, 잊혀지지 않은 악몽으로 자리잡은 세월호 참사와 헝가리 참사가 오버렙이 되어 온다. 출항시 악조건의
시골에 한 농부가 살았다. 그에게는 외동딸 하나가 살았다. 그는 딸을 애지중지 키워 대학까지 보냈다.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고향으로 내러오지 않았다. 거의 소식도 끊어졌다. 그는 딸이 궁금했다. 사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딸이 살고 있는 서울로 찾아갔다. 낯선 길을 물어물어 겨우 딸이 살고 있는 지하 단칸방으로 찾아갔다. 농부가 문을 두드리자 딸은 죽을상을 하고서 아버지를 맞이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이 측은해서 물었다. “얘야? 무슨 좋지 않는 일이라도 있니? 왜 그렇게 얼굴이 상했느냐?” 그러자 머뭇거리고 있던 딸이 대답했다. “아버지, 저는 지금 되는 일이 없어요. 직장을 구할 수가 없어요. 이력서를 내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요. 그래서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살아요. 그런데다 며칠 전부터 독감에 걸려 이렇게 시름시름 앓고 있어요. 병원에 가도, 약을 먹어도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요. 뿐만 아니에요. 제 꼴이 이러니 사귀던 남자친구조차 등을 돌렸어요.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아버지?” 딸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