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2022년을 즐겁게 상상해 본다. 올해는 당연히 코로나가 없어질 것이다. 지긋지긋한 마스크를 벗고 2년 전의 일상으로 회복되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어떤 장소에든지 대화하게 될 것이다. 자영업자들은 과거와 같은 밝은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더는 집, 일자리, 해고 걱정이 없는 살맛 나는 해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코로나가 준 반성의 기회를 잘 활용해 다시는 자연환경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우를 반복하지는 않는 첫해가 2022년이다. 아울러 금년은 지난해 노골적으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들이 시정되는 해가 될 것이다, 특히 공공의료 체계의 증대에 반대하는 의사들도 없을 것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의대 증원을 찬성하고 협조할 것이며 어려움을 함께 극복한 간호진 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크게 바뀔 것이다. 또한 내내 회자하였던 판검사들의 폭거도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엘리트 의식과 우월감에서 벗어나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닌 국민 앞에 겸허하고 인권수호의 최전방에 있는 일꾼임을 자임할 것이다. 당연히 올해부터는 출신과 학벌 등으로 구별 짓는 것들도 사라질 것이다. 이로써 2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유명한 저서이다. 제목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인데 내용은 지식인을 비판하고 있다. 왜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비판했을까?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식인은 사회의 특정 계층에 묶여 그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닌,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서고 초월하여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진리의 수호자이다. 그들은 사회 진보에 기여하고 다수의 이익에 봉직함으로써 그 정체성을 현재화한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지식인을 지배 수단을 연구하는 단순한 기능인으로 취급하여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이용할 뿐이다. 이때 피지배계급에게 지식인은 지배계급의 앞잡이로 전락한다. 이런 지식인을 사르트르는 지식 판매꾼이라며 맹비난했다.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부당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자들은 지식을 팔아먹는 지식 판매꾼이라는 것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을 만들고 또 그 정당성을 홍보하고 다니던 학자들부터 4대강을 꼭 정비해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조용조용히 설파하던 뱀의 혀를 가진 자들이 그들이다. 대선 정국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다. 각 진영마다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지식인들이 지지그룹으로 발표되고 있다. 눈에 가장 띄는 것은 교
코로나19(COVID19)로 인한 팬데믹(전 세계적 전염병 확산)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욱 악화하고 있다. 낯선 숫자인 하루 5000명대의 확진자가 연일 계속되고 있으며 경기도에서만도 지난 토요일 1400명대에 이르렀다. 방역당국은 이번 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했고 경기회복을 간절히 기대했던 수많은 자영업자 절망의 한숨이 커지고 있다. 더욱이 아프리카발 오미크론이라는 변이 바이러스의 발생은 우리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오미크론 바이러스는 그동안 발견되었던 코로나 변이종인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바이러스의 특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며 WHO(세계보건기구)에서 사상 유례가 없는 변이 바이러스라고 발표했다. 더욱이 그 확산 속도가 엄청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보고되는 그 순간에 이미 캐나다에서 확진자가 나올 정도였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나이지리아를 다녀온 부부에 의해서 오미크론 확진자가 퍼지고 있다. 백신 접종률이 2차까지 80%가 넘어 일상 회복을 꿈꾸었던 우리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전세계에서 우리 정도의 인구와 국력을 가
세계 2차 대전 말기 독일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유대인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는 강제 노역을 나가는데 수용소 내의 간호사가 그를 불렀다. 그녀를 따라간 비젠탈은 전쟁의 폭격으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나치 친위대(SS) 병사의 임종을 지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죽어가기 직전의 친위대원은 자신의 악행을 고해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유대인 ‘아무나’가 필요했고 그날 지목되어 온 ‘아무나’가 비젠탈이었다. 친위대원이 고백하는 내용은 유대인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밖으로 뛰쳐나오는 유대인들에게 총을 난사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한 행위로 인해 많은 번민과 고통 속에 있다가 이제 죽기 직전에 유대인에게 고백함으로써 용서를 받고자 한 것이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비젠탈은 고민했다, 죽기 직전의 그에게 용서한다고 말해서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동족을 무참히 죽인 그 나치를 여전히 증오해야 하는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병실은 나온 비젠탈은 자신의 대응에 또 다른 번민에 싸였다. 전후에
역사를 소수 엘리트층에 의한 지배로 본 이탈리아의 정치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는 대중의 지배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다. 대중들은 그저 자신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엘리트를 기대할 뿐이기에 그 엘리트가 순환하면서 역사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트의 순환론』(정헌주 역, 간디서원, 2018)에서 사자형(Lion)과 여우형(Fox) 엘리트가 교차한다고 했다. 사자형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강하고 충성심과 힘을 강조하며 용감하고 무모하며 때로는 무식하기까지 하다. 여우형은 현란한 말솜씨와 조작에 능하며 교활하고 주도면밀하며 때로는 유약하고 무능하기까지 한 지도자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의 역대 대통령에 대입해보자. 먼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교활한 여우 성향이 있었지만, 권위주의가 넘쳤던 전형적인 사자형의 지도자였다. 4·19로 2공화국을 출범한 민주당 정권은 의원내각제로 무책임한 장면 총리가 지도자였다. 3번째 지도자는 18년의 철권통치를 했던 라이온형의 박정희였다. 그의 사후 80년의 봄 시절 최규하는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 무능 그 자체의 폭스형이었다. 5번째 광주에서 피의 학살을 자행하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누가 뭐래도 사
2013년부터 8년이 지난 14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비로소 피의자 신분을 벗어났다. 그동안 간첩으로 오인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고 사회에서는 거의 격리되다시피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생업을 위한 어떤 일이나 활동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서야 모든 오해를 털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나의 8년은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느닷없이 탈북자 간첩으로 몰려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던 유우성 씨 이야기이다. ‘유우성 간첩조작사건’으로 알려진 이 건은 2013년 기소되었지만, 이듬해 국정원이 중국 공안의 출입국 도장을 위조해 북한을 왕래했다는 문서를 조작한 것이 밝혀져 무죄로 종결된 사건이었다.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MBC의 사장이 되었던 최승호 피디가 해직 언론인 시절에 만든 영화 [자백]으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여동생 유가려 씨는 6개월 동안 국정원이 했던 몹쓸 짓으로 아직도 트라우마에 고통받고 있다. 당연히 조작에 참여했던 국정원 직원들은 처벌을 받았지만, 함께 국가의 이름으로 그를 간첩으로 몰았던 검찰은 모두 불기소, 아주 경미한 내부징계로 종결되었다. 문제는 그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체제였던 민주주의가 지금처럼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은 불과 2-300여 년 전이었다. 민중(demos)과 지배(Kratos)의 합성어인 민주주의(민중의 지배, Democracy)가 18세기경에 다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부르주아 세력의 부각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던 군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지배자라는 의식은 매우 유용한 무기가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소위 시민혁명이 시작되면서 민주주의라는 오래전의 정치체제가 복권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절대 왕정을 거부하면서 등장했다.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서 국왕은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통과 권력의 중심이 의회로 넘어갔으며, 프랑스는 1789년의 대혁명을 통해 절대왕정을 무너트리고 비로소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인권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되었고, 미국은 1776년 독립혁명을 통해서 본격적인 민주주의의 정신을 구현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늘의 민주주의의 가치인 인간에의 존엄과 자유, 평등, 정의, 박애, 인권, 관용 그리고 인류애까지 모두 오랜 시간에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한 맹공이 여야를 초월해서 연일 계속되고 있다. 성남시장 재직 시 추진되었던 대장동 개발 건은 추석 민심의 바로미터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보도량이 엄청났고 길거리에도 화천대유는 누구 것이냐는 등의 문구로 도배되어 있다. 이 지사의 입장에서는 크게 서운하겠지만 내년 대선의 지지율 1위 후보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공격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진실이야 곳 밝혀지겠지만 정치는 법이나 경제처럼 조문의 해석이나 수치로 결과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성 영역이기에 먼저 예단하고 시작하는 게임이다. 국민은 진실여부를 떠나 한 번의 판단으로 내린 결정은 잘 바꾸질 않는다. 야당과 언론 심지어는 여당 경쟁자까지 어느 것 하나 그에게 우호적인 배경은 없다. 그럼에도 진정성을 바탕으로 오해가 불식된다면 그렇게 형성된 신뢰는 더욱 오래가고 견고해진다. 그러므로 이번 협공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이 지사의 향후 대선 가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어렵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임금을 꼽으라면 조선시대 정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친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서 돌아가실 때 11살이었다. 할아버지인 영조의 다리 춤에 매달
조선의 3대 군주인 태종 이방원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인 이성계를 따라 북방의 많은 전투에 참여한 호방한 인물이었다. 그가 당연히 왕위가 자신에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 것도 아버지를 도운 공로 때문이었다. 여하튼 곡절 끝에 왕위에 올라 태종이 된 그는 여전히 그 시절의 무인 기질로 사냥을 즐겼다. 즉위 4년 차인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다. 왕의 행차이므로 대소 신료와 호위무사 등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이리저리 사냥감을 찾던 그 순간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발견한 태종을 급히 말을 몰아 추적하였다. 한 손에는 활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말고삐를 잡은 형세는 영락없는 북방 무사 이방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꼬꾸라지면서 이방원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국왕 중심의 조선에서 왕의 변고는 국가의 변고였기에 주변의 모두가 달려와 왕의 안위를 챙겼다. 다행히 왕은 큰 탈이 없이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가 안심하는 순간 태종의 첫마디는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여라”였다. 평생을 전쟁터와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보냈던 태종이 익숙하게 타던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왕으로서 체면에 관한 문제였기에 그는 자신이 낙마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홍범도 장군이 서거 78년 만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의 예우로 그를 맞이하였다. 그동안 멀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 묻혀 계시던 전설적 인물인 홍 장군이 해방된 지 76년이 지나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되신 것이다. 아직 시신이 발굴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와 달리 그의 후반부 삶과 죽음을 알고 있기에 이제라도 모셔온 것에 만시지탄이지만 부끄러움을 면한 심정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 출신으로 군 나팔수 생활, 승려 생활과 포수시절의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회자되어 왔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은 1895년의 단발령을 계기로 함경도 안변의 학포라는 곳에서 14인의 동료와 함께 하면서였다.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살던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한 홍범도 부대는 400명에서 많게는 1400명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일대의 최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가장 먼저 전국적인 항일조직을 결성한 곳은 연해주에 망명 중인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13도의군이었다. 이 조직에 홍범도 장군이 참모부 의원으로 선출된 것은 이전의 활동에 대한 양반가 출신 지도부의 인정이었을 것이다. 1910년대 홍 장군은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