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대선 출마 선언에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앞으로 잘 준비해서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니 중차대한 후보가 앞으로 무엇을, 언제 공부하고, 습득해서 국정에 차질 없이 대비하겠다는 것인지. 그래도 우리들의 언론은 칭찬과 미담 일색이다. 하긴 또 다른 야권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연일 설화에 올라도 지지도는 여전히 1위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들 야당의 유력 후보라는 인물들은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권의 공직자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언행에도 공통점이 있다. 노동시간이 일주일에 120시간 정도도 괜찮다는 발언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정식품도 선택할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는 발언이나, 집도 생필품이니 세금 낼 필요가 없다, 최저임금의 인상은 범죄행위라는 발언까지 한결같이 그 저변에는 국민은 언제나 시혜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의 발언에서는 속 깊은 계급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다른 계급이므로 감히 올라올 생각을 말라는 우월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불가사의한 것은 이런 발언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이 사회이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는 무지의 극치를 이루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노선을 두고 갈라졌던 항일단체들은 이념 면에 있어서만은 삼균주의라는 정치이데올로기로 통합되어 있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주의 그리고 교육의 균등을 주장하는 삼균주의는 좌우의 독립운동단체들 대부분이 해방된 조국에 적용될 민족주의 정치이념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삼균주의를 만든 이는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으로 활동했던 우국지사 조소앙이었다. 그는 이미 임정의 헌법을 만들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으로 건국강령을 작성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 백범과 함께 귀국한 조소앙은 분단정권이 아닌 통일민주정부수립에 나셨다, 반탁운동과 죄우합작운동 등 그는 시종일관 임정을 대표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은 분단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민족운동의 몸부림이었다.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에는 임정세력과 함께 당시 가장 나이 어린 조만제(서울 상대 3년)가 삼균주의학생동맹 위원장으로 참석했다. 조만제는 조소앙에게 감명해 그의 삼균주의 노선을 따른 열혈 청년이었다. 남북협상팀은 나름의 성과를 가지고 귀환했지만 이미 냉전적 세계질서가 형성된 뒤라 허망한 결과를 주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북협상이 강조되는 것은 아무리 엄혹한
사법부가 정의를 실현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아무리 사회가 썩어도 그래도 최후의 보루로서 사법부가 살아 있다면 그 사회의 건강성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비난하면서도 그래도 초대 사법부 수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의 행적을 기억하고 또 죽산 조봉암에게 양심적 판결을 내렸던 유병진 판사와 법복을 입은 성자였던 김홍섭 판사를 떠올리며 “그래도 그 시절 믿을 곳은 있었어”하는 위안을 삼는 것처럼 말이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존경받는 판사의 계보는 누가 잇고 있는지 모르겠다. 국민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면 마지막으로 하소연할 곳이 사법부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사법부는 국민의 기대보다는 권력에 기대고 최근 들어서는 돈의 위력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급기야 지난 7일에는 소송한 지 6년 만에 열린 재판에서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나왔다. 이미 두 차례나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피해를 인정받은 일제의 징용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했는데 판결 논리가 가관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국제사회는 불법으로 보지 않는다”, “강제동원의 불법성은 국
1800년 5월 그믐에 정조는 교시를 발표했다. 오회연교(五晦筵敎)였다. 앞으로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하겠다는 정조의 야심에 찬 선언이었다. 재위 26년 만의 결단이었다. 즉위 초 조정은 결코 그에게 호락치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노론세력은 아버지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정조에 우호적인 남인과 소론은 미약했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 정조는 스스로 부하를 만들어 써야 했다. 그래서 만든 제도가 초계문신(抄啟文臣)이었다. 과거 급제한 자들 중 당파색이 옅은 젊은 인재를 선발해 규장각에서 3년 동안 특별교육을 시킨 후 관직에 나가게 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정조는 조선 후기의 찬란한 진경문화시대를 열었다. 중국 일색의 문화를 조선중심으로 바꾸었으며 실생활에 적합한 실용적인 정책들을 개발해 위민정치를 실시하였다. 사병화되고 있던 오군영을 대신한 장용영이라는 조선 최강의 군대를 육성해 자주국방의 초석을 놓았으며, 신해통공을 반포하여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고, 수원 화성을 건립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기득권 세력이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수도 한양을 천도할 구상까지 했었다. 심지어 그는 즉위하자마자 노비추세관을 폐쇄하는 등 장차 노비해방까지도 구상했었다.
4,7 보궐선거가 끝났다. 무능한 정권보다는 부패한 정권이 낫다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언론들은 그 결과를 두고 문 정권의 실정 특히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원인으로 꼽고 있다. 기울어진 언론지형을 탓하더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것은 청년층의 이탈이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출구조사에서 18~20대 남성 청년층은 야당후보를 70% 이상 지지했다고 한다. 촛불정권을 만든 청년들이 이제 촛불정권을 버린 것이라며 청년층이 보수화되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4, 50대와 달리 그들은 민주화운동과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않았기에 권위주의 정권의 폐를 이해하는 역사의식이 부족하고, 찰나적인 욕망에 부응하는 MZ(밀레니엄 세대)세대들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과연 청년층이 보수화된 것일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프고 상처난 곳을 어루만져주고 사회 전체의 힘으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끊임없이 약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 코로나 정국에서 전 국민이 힘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자영업자, 직장인, 공무원, 의료진, 알바생까지 모든 국민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외
올해도 어김없이 3·1절이 지나갔다. 모든 언론이 3·1운동 102주년이라고 썼다. 오랫동안 사용해 화석화된 잘못된 용어이다. 102년 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 인근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갔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경성 거리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끌려가던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국외의 독립선언과 의문스러운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민중의 분노가 치솟자 당시 국내 최대 종단인 천도교의 지도자들은 비밀리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각계의 지도층에게 함께 할 것을 제의했지만 대부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무시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마침 개신교에서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고 불교계의 두 분의 스님이 합류하니 종교계가 앞장서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천도교는 과거 실패했던 동학혁명을 다시 일으킨다는 자세로 준비했다. 준비된 독립선언서를 자체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비밀리 인쇄하다가 종로경찰서의 악질 조선인 순사에게 발각되기도 하고 완성된 선언서를 옮기는 과정에 파출소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등 곡절 끝에 3만 5천 장의 선언서를 종교 조직을 활용해 전국에 퍼트리는 데 성공하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의 서문에서 ‘나라가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음이 없으니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필히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썼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면서 이 글이 다시금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이후 쌓일 대로 싸인 기득권층의 카르텔을 그대로 두고는 새로운 미래사회가 열리지 않을 것이기에 이 시대의 화두는 여전히 개혁이다. 얼마 전까지 크게 거론되던 검찰과 언론 그리고 아직 거론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종교계, 재벌, 고위관료층, 학교, 군 등등 줄줄이 개혁 대상의 예비군들이다. 최근에는 판사가 탄핵되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판결을 잘못하거나 개인 비리 등으로 탄핵당하는 판사가 다반사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초의 탄핵이었다. 그동안 국가폭력의 최종 판정자들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는 고사하고 책임지는 자들이 단 한 명도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도 무풍지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공수처가 완성되면 그 강도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그 탄핵당할 정도로 부패한 판사가 대법원장을 찾아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대화를 몰래 녹음하고 공개해 버리자 졸지에 거짓말쟁이로 몰린 대법원장이 사퇴압박을
왜 정치뉴스가 쏟아지는가? 이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직종에는 대부분 라이센스 즉, 전문가 자격증이 있어야 위세를 할 수 있는 데 비해 정치영역만은 그 누구도 전문가 자격증이 없다. 세상에 모든 직종이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나름의 전문영역으로 권위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주변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치뉴스 속에서 정작 정치전문가는 없는 셈이다. 실제로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필자처럼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정치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다. 오히려 세칭 정치인들의 직업군을 보더라도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보다 타 직종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왜 정치영역만은 정치학 전공자보다 타 직종의 전문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은가.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는 누구나 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창시자인 BC. 5세기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민주정치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을 국민의 정치참여라고 했다. 정치는 어떠한 사회적 지위나 신분적 차별 나아가 학력의 유무 등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다 참여함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다만 현대사회는 모든 사람이 정치현장에 나가기 어려우므로 각계각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