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과 행위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의 사상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사상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자신의 영적 본성과 그 본성의 요구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애의 각 시기는, 우리가 의식하는, 우리의 의지에 의해 수행되는 행위, 즉 결혼, 취직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이를테면 산책할 때, 한밤중에, 식사 중에 떠오르는 사상에 의해 결정되는데, 특히 과거 전체를 통틀어 우리에게 너는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해왔지만 좀 더 다른 행동을 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얘기해 주는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그 경우 그 뒤의 우리의 모든 행동은 노예처럼 그 사상에 봉사하고 그 의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로) 인간이 그 앞에서 발을 멈추는 모든 사상은 그가 그것을 말하든 안 하든 반드시 그의 생활을 해치기도 하고 돕기도 한다. 죄악을 피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죄악의 뿌리는 나쁜 사상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사색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소로) 우리는 돈이 든 지갑을 잃어버리면 아까워하지만
인간의 거의 모든 지식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게으름을 거들고 그것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배반하는 삶을 살아온 현대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이 가장 참된 삶이라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현재, 문화라고 불리고 있는 것, 즉 학문, 예술, 온갖 형태의 진보와 발달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기만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이가 어른을,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듯, 굶주린 군중이 생활필수품도 없어서 쩔쩔매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사치품에 싫증내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루소) 식인(食人)의 시대에는 강자가 약자를 먹었다. 단적으로 말해 약한 자의 살을 먹었다. 그 뒤 온갖 법률이 정해지고 온갖 학문이 발달했지만, 무자비한 강자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불행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착취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그 살코기를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약자를 곤경과 궁핍에 빠뜨리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가혹한 노동으로 몸을 망쳐가면서 한평생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
진정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밖에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의 현상을 바꿀 수 있을 뿐, 결코 생명 자체를 멸망시킬 수는 없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밝음이 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 죽으면서 자기가 멸망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은 영원히 존재를 유지한다. (노자) 나는 현존하는 모든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의 전승과 교육의 영향에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나는 평생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깊이, 우리의 삶의 법칙에 대해 생각해 왔다. 나는 그것을 인류의 역사와 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 탐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 도달했다. 즉,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생명은 원래 영원한 것이어야 하며, 늘 그 자리에 있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생명의 법칙이라는 것, 내 안의 모든 능력과 모든 사상, 모든 요구는 실천을 통해 살려야 한다는 것, 우리 안에는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넘어서는 높은 사상과 동경이 있다는 것,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동경은 우리의 감성을 통해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인간은 모두 노예가 아니면 안 된다. 문제는 누구의 노예가 될 것인가이다. 만약 욕망의 노예라면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노예가 될 것이고, 정신적 본원의 노예라면 신의 노예가 될 것이다. 기왕이면 높은 주인에게 속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매우 사악한 의도로 해석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 진보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기초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우리’의 잘못이며 ‘우리’의 치욕이다. 누구든지 주위를 돌아보면 노동자들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권리와 이익이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가진 자들의 부정과 불의로 인해 우리 모두가 부유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헨리 조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서의 가르침이 이상하게 작동을 하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악도 선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잘못된 태도를 낳고 있다. (조헌정) 어떤 사물, 어떤 습관, 어떤 법률이 존중받으면 받을수록, 정말로 그것이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 생활의 악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 속의 종교적 허위를 버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마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허위는 회개하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오직 사랑하라고 말한다. 모든 추억을 멀리하라. 지나간 일에 대해 얘기하지 마라. 오직 사랑의 빛에 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내버려 두어라. (페르시아 격언) 젊을 때 쌓은 지성은 노년기의 악을 미리 예방하는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지성을 갖추는 것이 노년기를 위한 양식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당신이 늙었을 때 영양 결핍이 되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젊었을 때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여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길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헛되이 먼 곳에서 찾고 있다. 일은 해보면 쉬운 것이다. 시작을 하지 않고 미리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맹자) 씨ᄋᆞᆯ은 물입니다. 가는 길이 좁고 험하면 험할수록 아름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는 나만 아니라 남까지도 하나로 싸서 전체에 바치는 향기입니다. 몸을 가졌으니 쾌ㆍ불쾌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저 스스럽게 받을 뿐, 나를 거기 팔아서는 안 됩니다. 얻고 피하기에 마음을 쓰게 되면 나를 판 것인데, 나를 잃고는 역사의 주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모든 존재는 떼어놓을 수 없이 서로 굳게 맺어져 있다. 자신의 자아만을 진정한 존재로 생각하고, 다른 존재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도움을 주거나 방해하는 경우에 곧 일종의 상대적 관계만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은 깊은 심연을 사이에 두고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면 유일한 존재인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도 함께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한편, 모든 타자, 즉 살아 있는 모든 것 속에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명을 통해 살아 있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죽음으로 자기 존재의 극히 일부를 잃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모든 타자 속에, 자신이 항상 그 속에 자신의 존재 또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또 사랑해온 타자 속에 계속 존재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신을 타자와 분리하는 기만과 망상이 사라진다. 이러한 점에서 지극히 선량한 사람과 지극히 사악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 극명한 차이가 드러나는데, 오직 이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쇼펜하우어) 나는 결코 나 한 사람만의 구원을 원하지 않고 또 인정하지도 않는다. 혼자서만 안심하여 살고 싶지도 않다. 나는 가는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영원하고 무한한 영혼으로, 다시 말해 현상으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물자체(物自體)로서 시공을 초월한 영혼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 진정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서 선으로 인정하는 것에 이끌리지 말고, 진정한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율적인 정신적 탐구욕보다 존엄하고 생산적인 것은 없다.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갖고 그런 다음에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에머슨) 몸뚱이는 외물입니다. 정신이 잠깐 머무는 여관입니다. 이 여관이 무너지는데 그 여관을 갖다가 아무개가 묵은 여관이라고 하며 쓰러진 집을 보고 기념한다고 말합니다. 자손을 두는 것도 치장하려는 것입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무사가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물에 빠트렸는데, 그 칼을 찾으려고 떨어뜨린 뱃전에 표시를 해두었다는 말입니다. 제 무덤을 치장하겠다는 것은 이런 짓과 같습니다. (류영모) 역사는 심판이 동시에 또 예언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과거를 심판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역사를 읽고 인간은
(9월 6일 월요일 늦게 헤이그로부터 미샤 힐레슘과 가족들을 이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에티에게는 그것이 끔찍하고 갑작스레 일어나 깜짝 놀랐다. 에티는 언제가 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부모와 함께 가지 않고 혼자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조피는 에티가 떠나는 날 열차로 걸어가는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기차로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명랑하게 웃으면서 친절한 말을 했고, 활기찬 쾌활함이 충만했고, 아마도 슬픈 기미가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에티는 어느 모로 보나 괜찮았다. ...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1번 화물차에 타는 것이 보였다. 결국 에티는 12번 화물칸에 타게 되었다. ... 그 후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리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1,000명의 ‘이송 대상자들’이 떠났다. 1번 화물칸의 틈새로 언뜻 미사가 힘껏 손을 흔드는 모습이 휙 지나갔고, 12번 화물칸에서 에티가 쾌활하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 그들은 가 버렸다. (열차가 네델란드를 떠나기 전에 에티는 크리스틴 반 누텐에게 보내는 엽서를 써서 열차의 판자벽 틈새를 통해 밖으로 던졌다. 부근의 농부들이 그것을 주워서 주소지로 보냈다. 엽서에는
(에티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피신을 하거나 숨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에 앉아서 쓴다. 숨었던 2만,000여명 중 1만8000여명은 살아남았다.) 당면한 문제는 우리의 파멸과 멸절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환상에 빠져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나섰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나아가야 한다. 최근 며칠 새 나의 내면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어떤 것은 구체화되었다. ...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았고, 그것을 삶에 받아들였다. 그래도 삶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의 삶은 죽음 덕분에 확장되었다. 죽음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파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삶이 확장되었다. 만일 소환장이 내일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 속으로 물러나, 몸과 영혼의 구석구석에 있는 기력을 모두 모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은 던져버릴 것이다. 그 주가 끝나기 전에 릴케의 편지를 마저 읽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남겨두었던 두꺼운 겨울 외투 옷감으로
부자 그리스도인이란 발 없는 경주마라는 말과 같이 모순된 말이다. 세상에서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은 그 사람의 가진 부에 정비례하며, 인간의 내면적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진정 깨달은 사람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존경심에서 재물과 돈을 부끄러워한다. (에머슨) 이번에는 부자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닥쳐 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십시오.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나는 도처에서 사회복지라는 이름하에 자신만의 이익을 좇아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의 음모를 보고 있다. (토머스 무어) 부는 오만과 잔인, 자만으로 인한 난폭, 부패와 타락의 뿌리이다. (퓨지) 차라리 부자의 냉담함이 그들의 동정심만큼 잔인하지 않다. (루소) 부자를 존경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 부자는 자신의 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획득은 자본(판돈)의 크기에 달려 있다. 이는 일종의 도박장에서의 카드놀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