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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오늘의 성찰'] 대량 추방

 

(에티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피신을 하거나 숨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에 앉아서 쓴다. 숨었던 2만,000여명 중 1만8000여명은 살아남았다.)

 

당면한 문제는 우리의 파멸과 멸절이 임박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환상에 빠져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려고 나섰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나아가야 한다. 최근 며칠 새 나의 내면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어떤 것은 구체화되었다. ...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았고, 그것을 삶에 받아들였다. 그래도 삶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의 삶은 죽음 덕분에 확장되었다. 죽음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파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삶이 확장되었다. 

 

만일 소환장이 내일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내 속으로 물러나, 몸과 영혼의 구석구석에 있는 기력을 모두 모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립스틱은 던져버릴 것이다. 그 주가 끝나기 전에 릴케의 편지를 마저 읽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남겨두었던 두꺼운 겨울 외투 옷감으로 바지 한 벌과 상의를 만들어야겠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최선을 다해 안심시킬 것이고, 짬이 날 때마다 그에게, 언제나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것이다... 며칠 안에 치과에 가서 많고 많은 충치를 때워야겠다. 수용소에 있을 때 이가 아프면 정말 끔찍할 테니까. 배낭을 구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만 채워 넣을 것이다. 그것도 모두 품질 좋은 것들이어야 한다. 성서를 가지고 갈 것이고, 얇은 책인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가져가고, 분명히 『기도시집』도 넣을 수 있을거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은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겠다. 다만 그들의 얼굴과 익숙한 몸짓들을 모아 내면의 공간에 있는 벽에 걸어두겠다. 그러면 그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이 두 손과 단단한 어린 가지처럼 표현이 풍부한 손가락들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그러면 두 손은 기도로 나를 보호해 주고 마지막까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온화하고 부드럽게 탐색하는 표정을 지닌 짙은 색 눈도 나와 함께 갈 것이다.

 

출처 : 『에티 힐레숨』 패트릭 우드하우스. 이창엽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에티 힐레숨 1914-1943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아우슈비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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