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고, 부자는 자비로울 수 없다. (만주 속담)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 때, 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리 자선을 베풀어도, 그들이 여전히 부를 옹호하고 사치에 빠져 있는 한, 세상을 해롭게 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를 숭배하며 가난을 경멸함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유일한 행복은 부에 있다고 유혹하고 있다. (채닝) 만약 재물이 당신 것이라면 어째서 저승으로 가지고 가지 못하는가? (벤자민 플랭클린)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예수) 나의 재산은 소유(所有)가 아니라 향유(享有)에 있다. (소로) 돈을 버는 것은 기술(技術)이요 돈을 쓰는 것은 예술(藝術)이다. (무명의 목사) 월말 은행 지출 명세서는 당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해준다. (조헌정)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오랜 대화 뒤에는 대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상기해보라. 그러면 그 대화의 대부분이, 아니 때로는 전부가 참으로 공허라고 쓸데없고 종종 사악했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이미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사디) 네가 말을 할 때에는 그 말이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한다. (아라비아의 속담)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일이 한 번이라면, 침묵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일은 백 번이 될 것이다. 선량한 사람은 말다툼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말다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 선량하지 않다.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박식하지 않으며, 이른바 박식한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한 말은 종종 귀에 거슬리고, 귀에 듣기 좋은 말은 종종 진실하지 않다. (노자) 육체노동은 하찮은 잡담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유익하다. 현명해지고 싶으면 현명한 질문을 하고, 주의 깊게 들으며, 차분하게 대답하고, 그리고 할 말이 없을 때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다. (라파테르) 사람들이 오랫동안 논쟁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그들이 논쟁의 쟁점을 그들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기대어 이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이를 널리 밝히며, 민족의 오래도록 변함없을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에 따른 세계 개조의 기회에 따라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가 함께 생존하고 같이 살아 나갈 권리의 정당한 움직임이니 하늘 아래 어떠한 것이든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비롯하여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몇 천 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겪은 지 지금까지 10년이 지났으니 우리 생존권을 빼앗긴 것이 무릇 몇이며, 정신적 발전에 장애가 됨이 무릇 몇이며, 민족적 존엄이 훼손된 것이 무릇 몇이며, 새로움과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흐름에 기여하고 도움을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무릇 몇인가. 아아 슬프도다. 오랜 억울을 드러내려 하면, 지금의 고통에서
인류가 진보하는 것은 바로 종교적 신앙이 진보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진보한다는 것은 새로운 종교적 진리를 발견하거나, 인간의 세계와 신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탐구하는(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이해와 결부된 모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는 일이다. 새로운 종교적 진리라는 것은 없다. 유사 이래 모든 현자의 세계 및 신에 대한 관계는, 오늘날의 것과 완전히 같다. 종교가 진보하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 발견되고 표현된 것을 정화하는 데 있다. 신앙이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선각자들에 의해 도달된, 인생에 대한 가장 높은 이해의 지표이며, 그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도 언젠가 틀림없이 불가항력으로 그것에 접근해가게 된다. 진정한 진보, 즉 종교적 진보와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진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기술적, 과학적, 예술적 업적은 현대에서 볼 수 있듯 종교적 퇴보 속에서도 매우 위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을 탐구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온갖 미신과의 싸움과 종교적 의식의 해명,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진보의 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권력의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여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노동만큼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사람은 노동하지 않고는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다.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겉치장에 그토록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경멸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땀 흘려 일하며 자신이 먹을 빵을 제 손으로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진정한 종교적 이해와 순수한 도덕성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존 러스킨) 지극히 확실하고 순수한 기쁨의 하나는 노동 뒤의 휴식이다. (칸트) 가장 탁월한 재능도 무위도식하면 사장된다. (몽테뉴) 공정함이란 자신이 남에게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남에게서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동과 자신이 이용하는 남의 노동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스스로 일할 능력을 잃고 남의 노동력을 가로채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므로 되도록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 평소에 자기가 취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남에게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중, 대중하지만 대중은 고상한 이상에 통일되지 않는 한 우중(愚衆)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
자아는 우리 내부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가리는 덮개이다. 우리가 자아에서 벗어날수록 우리 안의 신성은 더욱더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는 자아에 대해 고민하고 자아에 얽매이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더 나약해지고 더욱더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집착하거나,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강해지고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만약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무슨 일을 도모한다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 진리는 그것이 자신의 자아를 버린 사람의 입에서 나왔을 경우에만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탈무드) 인간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 (플라톤) 자신의 명성과 육체 속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 자야말로 인생의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부처) 이야기 도중에 자기를 의식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쳐버린다. 자기를 완전히 잊고 자아를 떠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도움을 주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은 물론 타인의 인생을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자연의 혜택을 누릴 권리와 존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는 너무 왜곡되어 있고 주요 가르침이 전혀 실천되지 않고 있다. 그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자 형제자매이고 각각의 생명은 신성불가침하다는 가르침이다. 진정한 평등은 신분 제도와 칭호와 특권의 폐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낳는 최대의 무기인 폭력의 근절을 요구한다. 평등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사회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없으며,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이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정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된 종교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남들보다 강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므로, 평등 같은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보다 강하고 영리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가 더욱 필요하다고 리히텐베르크는 말했다. 왜냐하면 강하고 똑똑한 강자들의 약자에 대한 박해가 무서운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권리의 불평등까지 자아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깎이면 나라 역시 쇠잔해지는 법이다. 그러니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
종교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다. 종교란 단순한 형태로 마음에 호소하는 예지이다. 예지란 이성에 의해 인정된 종교이다. 사람들이 종교라고 일컫는 것에서 그들의 교육관과 정치 형태, 경제 기구, 그리고 모든 예술활동이 태어난다. (주세페 마치니) 선한 생활의 법칙(살생하지 말라, 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등등)은, 그것이 신의 계율이기 때문에 진리이며,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법칙들을 자신의 내면적인 의무로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신의 계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칸트) 사람은 선한 생활에 의해서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르고 깨끗하고 선량하고 겸허한 생활 이외의 그 무엇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기만이요, 하느님에 대한 거짓 봉사이다. (칸트) 종교란 세상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심장과 같다. 곧 사람은 종교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다만 자신에게 심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렇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
천성적인 소박함과 예지에서 오는 소박함이 있다. 이 둘 다 사랑과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대수방정식과 같다. 즉 가장 간단한 형태로 바꿈으로써 풀리는 것이다. 진실한 말은 언제나 꾸밈이 없고 단순하다. (마르실리우스) 가장 위대한 진리는 가장 간결하다. 어린아이와 동물이 지닌 매력은 바로 소박함에 있다.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조작한 차별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연은 신분이나 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자질을 부여한다. 자연스럽고 선량한 감정은 오히려 서민들 가운데서 더욱 많이 볼 수 있다. (레싱) 사람들이 교활하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은, 우리를 속이거나 잘난척하기 위함이다. 그런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되며 흉내를 내서도 안 된다. 좋은 말은 언제나 간결하고 누구나 알기 쉬우며 논리적이다. 솔직함이란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부아스트) 솔직함은 언제나 고상한 감정에서 생긴다. (달랑베르)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네가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 되도록 말하는데 힘써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직선로가 열려야 한다. 하느님
죽음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데도, 우리는 마치 죽음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인간의 생명이 과연 죽음과 동시에 끝나는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불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위는 이성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가, 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만약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속의 무엇이 불멸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속에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 멸하는 것보다 멸하지 않는 것에 대해 더 많이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그것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스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의 온갖 고통이 선을 낳지 않는다면,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사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