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사랑을 전파하는 것만이 현재의 사회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위험한 말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지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사악한 행위가 자행되며,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큰 사악한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사랑이 인간 생활에 의의를 주고 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만,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동서고금의 현자들에 의해 해답이 제시되어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답이었다. 즉, 흔히 사랑이라 불리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마치 서로 이방인이나 원수처럼 살고 있는 이 피폐하고 낡은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준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여, 그들은 당장 정치가들의 외교활동과 거대한 군대, 수많은 요새가 아주 쉽게 사라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은 어떻게 저런 불필요하고 사악한 것을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을까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에머슨) 중국의 현자 가운데 맹자와 비교되는 묵자(墨子)가 있다. 그는 권력자들에게 힘
진실은 그 자체가 선은 아니지만 모든 선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다.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처음부터 거짓임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하는 의식적인 거짓말과, 도저히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때 본의 아니게 하게 되는 거짓말이다. 오직 미망만이 인위적인 지지를 필요로 한다. 진리는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다. 진리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고, 진리의 감미로움보다 더 감미로운 것은 없다. 진리의 기쁨은 그 어떤 기쁨보다 크다. (부처) 완전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언제나 온갖 종류의 모순 대립하는 욕구가 있으며, 그것이 서로 싸우면서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므로, 그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진실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자만이, 우리가 얼마나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거짓말은 모든 실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헌것을 새것이라 하고 팔거나, 흠이 있는 물건을 그렇지 않은 양 속여 팔고, 갚지 않을 거면서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주 흔한, 그리고 아주 큰 불행으로 이끄는 유혹의 하나는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유혹이다.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쳐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예수) 우리에게 특별한 존경을 요구하는 사물을 만나면, 옷을 벗기듯 그것을 추앙하는 말들은 모두 벗겨내는 것이 좋다. 외면적인 치장은 자주 이성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때가 가장 속고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잘못된 수치심은 악마가 즐겨 쓰는 무기이다. 악마는 그 수치심을 이용해 잘못된 교만 이상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는 잘못된 교만만으로는 그저 악을 부추길 뿐이지만, 잘못된 수치심으로는 선을 저지할 수 있다. (존 러스킨) 이 세상에 악은 없다. 악은 모두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며, 이것을 물리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중의 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민중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모른다. 나이 많은 사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신이 살고 있는 정도에 따라 신을 볼 수 있다. 17세기의 신비적인 시인 안젤루스가 말했듯 내가 신을 보는 눈은 그대로 신이 나를 보는 눈이다. (아미엘) 인간의 영혼은 곧 신의 등불이다. (탈무드) 어느 날 강 속의 물고기들이 물고기는 물속에서밖에 살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인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말을 들은 물고기들은 무척 놀라서, 도대체 물이 뭔지 아는 물고기가 없느냐고 서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 영리한 물고기가 말했다. “바다속 공부를 많이 해서 지혜로운 늙은 물고기가 한 마리 있는데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더군. 우리 바다로 헤엄쳐 가서 그 노인한테 물이 무엇인지 물어보세.” 그리하여 물고기들은 지혜로운 물고기가 살고 있는 바다에 가서, 물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면 물에 대해 알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지혜로운 늙은 물고기가 말했다. “물이란 우리가 그것에 의해 살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물을 모르는 것은, 너희들이 그 속에서 살며 그것에 의해 살고 있기 때문이지.” 그와 같이 사람들도 신에 의해 살고, 신속에 살고 있으면서 신을 모르고 있다. (수피) 자신의 사상을 하늘 높이 올리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선량함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없다. (루소) 선행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다. 대가를 예상하고 이루어진 경우에도 역시 선이 아니다. 선은 인과율을 초월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횃불과 불꽃이 아무리 강력해도 태양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리듯이, 우리의 지능도(설사 천재라 하더라도) 또 아름다움도, 마음으로부터의 선량함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린다. (쇼펜하우어) 한없는 부드러움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천성이자 재산이다 (존 러스킨) 연약한 식물이 단단한 흙을 뚫고 바위가 갈라진 틈을 지나 자생한다. 선량함도 그와 같다 어떠한 쐐기도, 어떠한 망치도, 어떠한 무기도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 (소로) 인간이 있는 곳에는 그에게 선을 행할 기회도 있다. (세네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의 마음에 든다거나 우리에게 선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서 모든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신의 영혼을 보기 때문에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사랑, 진정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 사랑이 가능해지는 이유이다. 위대가 무엇이 위대겠습니까? 강대국의 뒤를 따라가며 그 후진을 무릅쓰는 이른바 후진국 의식을
인간의 사명은 모든 사람에 대한 봉사이며, 특정한 사람을 위해 일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봉사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애국심이 이웃에 대한 사랑에 방해가 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애국심에 희생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애국심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희생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악인의 마지막 피난처는 애국심이다. 오늘날 애국심은 모든 사회악과 개인의 추행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 우리는 조국의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그 조국을 존경할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을 거부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우리는 애국심이라는 이름 아래, 개개인을 타락시키고 국민 전체를 파렴치한 행위를 하도록 이끈다. (비처)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많은 악을 저지르고, 가족을 위해 더욱 많은 악을 저지르지만, 애국심을 위해서 가장 무서운 잔학행위, 이를테면 간첩행위, 민중에 대한 가렴주구, 비참하기 그지없는 살육의 전쟁을 저지르면서도, 그러한 잔학행위를 자랑하기도 한다. 오늘날처럼 전 세계의 민족들이 서로 교류하고 있는 시대에, 단순히 자기 나라에 대한 편협한 사랑을 호소하며, 언제든지 다른 나라와 전쟁을
전쟁이 낳는 모든 나쁜 관념, 즉 국가간의 증오, 무공(武功)에 대한 동경, 승리 또는 복수에 대한 갈망 등은, 국민의 양심을 짓밟아 인간 상호의 선의를 ‘애국심’이라는 이름의 비열하고 무분별한 이기심으로 바꾸고, 자유에 대한 사랑을 허물어뜨리며, 단순히 남의 목을 베려고 하는 야만적인 욕망에서, 또는 남이 내 목을 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사람들은 지배계급의 발아래 스스로 몸을 던진다. 전쟁에 의해 부추겨진 나쁜 관념은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완전히 왜곡시켜, 교회 지도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살인과 약탈을 위한 무기를 축복하고, 대지가 피투성이 시체로 뒤덮여 죄 없는 백성들의 가슴이 슬픔으로 가득 찰 때, 평화의 하느님을 향해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모순을 낳는다. (헨리 조지) 어린이들은 처음 만날 때, 기쁨에 찬 얼굴로 서로 웃으며 호의를 보인다. 대부분의 어른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러나 한 국가의 일원이 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웃 민족을 증오하며, 그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겨주려고 마음먹게 된다. 사람들 속에 이와 같은 증오심을 조장하여 그러한 잔학 행위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죄가 어찌 무겁지 않을 것인가! “분할하여 통치하라” 이 말속에 모든
현대는 그야말로 비판의 시대이다. 그런데 종교와 법률기관은 일반적으로 비판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종교는 그 신성함의 힘을 빌리고, 법률기관은 그 외면적인 위대함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와 법률기관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의혹을 부채질해 사람들의 참다운 존경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성은 자유롭고 공개적인 판단을 거친 것만 존경하기 때문이다. (칸트) 인생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진실을 더 많이 파악하고 더욱더 그 진실을 좇아서 사는 것이다. 그릇된 종교는 모두 자신의 경전(베다, 성서, 코란, 불경 등) 속에 확실하게 완성된 더할 나위 없는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방법(신앙, 제물, 기도, 은총 등)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진리를 탐구할 필요도 없고 자기 생활의 개선을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이성이 인간의 신화를 파괴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성은 진리와 맞바꾸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파괴하지 못한다. 정치와 종교는 다 인간의 생활을 각각 두 면에서 한데 묶어놓는 묶음이다. 하나는 평면에서 하나는 수직에서, 하나는 땅에서 하나는 하늘에서, 하나는 현실에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은 참으로 깨닫기 어려운 듯 보이지만, 잘 관찰하면 그야말로 변화의 연속이다. 그러나 극히 어린 시절에 일어나는 그 변화의 시작과 죽음을 동반하는 그 끝은 인간의 관찰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예수) 생명은 끊임없이 그 겉모습을 바꾼다. 사물의 겉모습밖에 보지 않는 무지몽매한 인간만이 일정한 형태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사라지면 생명 자체가 소멸했다고 생각한다. 실은, 일정한 형태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기 위해서이다. 애벌레가 사라지고 새롭게 나비가 되어 나타난다. 어린아이가 사라지고 대신 청년이 나타난다. 동물적인 인간이 사라지고 새롭게 정신적인 인간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류시 말로리) 도토리는 가지, 잎, 줄기, 뿌리, 즉 모든 외형, 모든 고유한 형태를 잃었지만, 그 속에 자신이 포기한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생산력을 간직한 상수리나무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신의 영혼이 살고 있음을, 너에게 생명을 준 신의 영혼이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영혼이든 신성불가침 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존중해야 한다. 인간이 죽는 것이나 돈과 집과 재산을 잃는 것은 그리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원래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재산, 즉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었을 때,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함과 분별심을 잃었을 때 비로소 불행해진다. (에픽테토스)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 속의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인간의 최고의 특질은 그가 정신적 안정상태에 있을 때 그 의식이 이성의 원천과 교류하여, 무한한 영적 생명과 융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원천에서 직접 영혼의 양식을 길어 올리려 하지 않고, 마치 거지처럼 고인 물 한 국자를 서로 동냥하고 있다. (에머슨) ‘나마스떼!’ 이는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문안 인사드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인사는 ‘(밤새) 안녕하십니까?’이다. 이런 일상의 인사가 개인의 품격과 민족사상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다. 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