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은, 받는 자에게 필요한 정도나 베푸는 자의 희생의 정도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성립되는 신과의 합일의 정도에 의해서만 헤아릴 수 있다. 삶은 반드시 선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좋은 삶만이 선하고 행복하다. (세네카)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선보다 자신이 입을 피해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은 금방 잊혀지지만, 모욕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세네카) 우리가 대가를 기대하면서 의무를 행할 때, 그것은 선이 아니라 기만에 찬 선의 모형, 선의 유사품이다. (키케로) 비난과 불명예가 거꾸로 너를 덮치지 않도록 남을 비방하지 말라. 악령은 앞에서 덤벼들지만 비방은 언제나 뒤에서 몰래 덮친다. 분노에 몸을 맡기지 말라 분노에 몸을 맡긴 사람은 자신이 할 일을 잊고 자신의 선행을 놓치기 마련이다. 근면하고 과묵하며, 자신의 노동으로 살고, 자기가 생산한 것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저축하라. 그러한 습관은 네 행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는 시비를 따지지 말라. 악인한테는 돈을 빌리지 말라. 비방하기 좋아하는 자와는 함께 일하지 말라. (동양 금언) 하나의 선행을
우리가 지난날을 괴로워하며 미래를 망치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경시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환상이며 현재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현재에 모든 정신을 기울여라. 우리는 오직 현재 속에서 영원을 인식한다. (괴테) 가장 흔한 망상의 하나는 현재를 가장 절실하고 결정적인 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하루가 1년 중에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에머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조상은 더욱 훌륭했다”고. (탈무드)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자신의 그릇(육체)을 이용하라. 내일이면 깨질지도 모른다. (탈무드) 너는 과연 네가 해야 할 일을 했는가? 그것은 참으로 크고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네 삶의 유일한 의미는, 너에게 주어진 짧은 생존 기간 동안에 너를 이 세상에 보낸 자가 바라는 바를 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 원래 과거와 미래는 없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언제, 그 환상의 왕국을 탐험했다는 말인가!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내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남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확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신앙뿐이다. 종교 없이 도덕을 세우려고 시도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식물을 옮겨 심으면서, 마음에 들지 않고 쓸모없어 보이는 뿌리를 잘라버리고 뿌리가 없는 식물을 땅에 꽂아 놓는 것과 같다. 뿌리가 없는 것은 진짜 식물이 아닌 것처럼, 종교적 기초가 없는 것은 결코 진정한 도덕일 수 없다. 한 사제가 착하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농부의 고해를 받으면서, 평소에 하던 대로,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믿지 않습니다,” 농부가 대답했다. “어째서 신을 믿지 않습니까?” “신부님, 만일 제가 신을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살아갈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맨날 나만 생각하고 먹고 마시는 것만 생각하고, 형제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농부처럼 신앙을 이해하고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앙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믿는 것
부에 대한 기쁨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도 못한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예수) 예수는 “너희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하늘)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하늘에 쌓아둔다는 말은 사회적 나눔을 의미한다.(조헌정)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재물을 최고의 보물로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참 마음을 가꾸는 것보다 부를 축적하는 일에 천배나 많은 노력을 한다. 사실은 우리가 행복을 얻는 일에는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이 외면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도 말이다. (쇼펜하우어) 네가 자신을 위해 요즘 유행하는 장식품을 하나 샀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앞으로 그것 말고도 열 개나 되는 최신 유행품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에머슨) 왜 인간은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에게 값진 말이, 훌륭한 옷이, 아름다운 저택이,
삶은 꿈이고, 죽음은 깨어남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죽을 때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숨결이 돌아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을 가사(假死)라고 하는데, 죽었다가 새로운 육체의 기관들을 가지고 다시 깨어나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다. (리히텐베르크) 사라지는 생명과 그 뒤에 나타나는 다른 생명은, 단순히 약간의 변용을 통해 존재양식을 바꿨을 뿐 결국 동일한 존재이며, 따라서 개체 자신에게는 잠인 것이 그 개체가 속한 종에 있어서는 죽음이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설사 영혼은 불멸이라고 믿는 내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역시 나는 행복하고 내가 틀린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나에게 이토록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과, 이토록 충실한 만족감을 주는 그 신념을 나한테서 빼앗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키케로) 죽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물음은 물음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 죽음 뒤의 세계를 얘기하는 것은 시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인데, 우리는 죽음과 함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 초월을 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 완성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인생의 법칙이다. 아예 실천이 불가능하다면 처음부터 도덕률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원래 이기주의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색하고 음탕한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원래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마음속 깊이 느끼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줄 것이다. (솔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네가 지금 그대로의 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하리라. 너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자타의 이기심과 무관심의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를 그만두고 비록 위대하지는 않지만 청정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는 일이다. 너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영혼의 흔적이나마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 형제들이여!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내면에 영혼과 양심을 눈뜨게 하고, 우리의 게으름을 성실로, 생명 없는 돌 같은 심장을 살아 있는 그것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무한한 선의 계열을 조금이나마 확실한 일관성
모든 일은 그것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대처하는 것이 좋다. 큰 나무도 어린 가지에서 시작 되고, 구층탑도 작은 벽돌 한 장에서 시작되며,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다. 자신의 사상에 주의하라. 사상은 바로 행위이다. (노자) 만약 내가 피와 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이 우리들 각자에게 내려준 육체보다 고귀한 영혼, 우리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영혼에 의해 우리 모두가 이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나는 그토록 나와 가까운 존재에게 화를 내거나 불쾌감을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창조되어 있어서, 마치 손과 손, 발과 발이 언제나 서로를 돕는 것처럼, 서로를 도와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모욕하는 이웃한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고 모욕을 받은 상대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본성에 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불꽃이 조용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촛대를 놓아야 한다. 바람이 불면 불꽃이 일렁거리며 어둡고 이상한 그림자를 던진다. 그러한 그림자는 너의 깨끗한 영혼의 표면에 나쁜 사상을 던져줄 것이다. (바라문의 금언) 세상의 번거로
논쟁은 언제나 진리를 분명히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애매하게 만든다. 진리는 고독 속에서 성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하면 논쟁이 없이도 받아들여질 만큼 명확해진다. 자기가 옳을 때도 끝까지 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큰 힘이 있다. (칸트) 논쟁을 하지 말라. 논쟁은 설득하는 데 가장 불리한 방법이다. 사람들의 의견은 못과 같아서 때리면 때릴수록 깊이 들어가 뺄 수 없게 된다. (유베날리우스) 누군가가 너희를 슬프게 하거나 모욕을 줄 때는 흥분이 가라앉기 전에는 반박하지 말 것이며, 꼭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정신적 동요부터 가라앉히라. (성현의 사상) 지금 당장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을 때는 침묵하라. 잠시 침묵하다보면 이윽고 마음도 가라앉을 것이다. (박스터) 나쁜 병에 걸린 사람에게 화를 낼 수 없듯이 마음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하고 너는 말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의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도 이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웃에게 그 결점을 일깨우기 위해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너 자신의 이성의 힘을 발휘해 이웃의 마음에 양심을 눈뜨게 하여,
예수는 이미 그 도덕적 기초가 흔들리고 있던 기존 사회의 종말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활 질서의 물질적 상징인 신전은 더욱 완전한 것의 건설을 위해 무너져야 한다.’고 예언했다. 그리고 그는 조만간 실현될 그 예언 위에, 훨씬 훗날 실현될 똑같은 사태에 대한 예언을 덧붙이며, 그 사태를 당시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하던 모습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우리는 지금 그가 예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전 세계의 끝에서 끝까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기초가 되는 모든 시설과 질서를 살펴보면 튼튼한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곧 모두 붕괴되어 예루살렘 신전처럼 신전의 돌 위에 돌멩이 하나 남지 않는 상태가 되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라므네)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평지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빨리 해돋이를 본다.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육체적인 생활만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빨리 영적인 해돋이를 본다. 그러나 얼마 후 때가 되어 해가 솟아오르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된다. 지금까지 종종 사람들이 남을 위해 죽는 것이 쉽
우리의 생명의식과 신의 관계는 우리의 감성과 세계 또는 사물과의 관계와 같다. 감성이 없으면 우리는 세계와 사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생명의 의식이 없으면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신을 섬기는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고 이성이 주는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사를 가지면서도 역시 정의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신이다. 대체로 우리의 마음이 신을 인식하는 것이며, 그 인식을 이성에 전달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어려운 일이다. 또 과연 이성은 마음 없이 저 혼자 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을 인식해야 이성이 그것을 탐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리히텐베르크) 신의 이념은 확실히 위대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한하게 정화되고 무한하게 높여진 우리의 정신적 자질의 이념이다. 신성 이념의 기초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채닝) 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 좋은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엔젤리스 실리시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