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청년 일자리와 청년 주거 등 다양한 청년 정책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사회가 청년을 중심으로 움직이기는 어렵다는 현실과 마주하며 ‘사람은 왜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으로 변하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젊을 때는 세상을 바꾸겠노라 말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안정과 질서를 노래하고, 신기술과 신문명에 거리를 두며 “예전이 좋았어”라고 말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수화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일까? 아니면 우리가 살아온 경험과 사회적 위치가 만들어 낸 결과일까? 심리학과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노년의 보수화는 단순한 노화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닌, 분명한 생물학적·심리적·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인간은 나이 들수록 새로운 변화에 따른 이익보다 손실 위험을 더 크게 인식한다. 따라서 축적한 자산과 관계, 사회적 지위를 지키려는 욕구가 커진다. 이는 단순한 ‘꼰대 기질’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안정되게 유지하려는 심리적 변화로 이해된다. 그리고 보수화의 핵심에는 ‘손실 회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자신만의 기준과 방식을 갖고 있다. 오랜 시간 반복해서 성공한 방식은
결혼식장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신랑도 웃고, 신부도 웃는다. 하객들은 "행복하게 잘 사세요!"를 외친다. 그러나 신혼여행이 끝나고 현실이라는 캠퍼스에 입학하는 순간, 많은 부부는 뜻밖의 전공을 선택하게 된다. 바로 '갑과 을의 역할분담학'이다. 주변에 "가정은 기업일까, 공동체일까?"를 물으면, 미혼이거나 신혼 초인 사람들은 대부분 "공동체"라고 답한다. 그런데 기혼자들은 대답이 조금 달라진다. "우리 집은 부장님이 한 분 계십니다." 누가 부장님이냐고 물으면 재미있는 것은 부부가 서로 상대방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갈등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쓰레기봉투 하나, 설거지 한 번, 아이 숙제 확인 같은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경제학에서는 '기회비용'을 이야기하지만, 결혼생활에는 '감정비용'이라는 것이 있다.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왜 나만 하지?'라는 생각이 커질 때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는 언제나 갑과 을이 생긴다. 문제는 누가 갑이냐가 아니다. 오늘의 갑이 내일은 을이 되고, 건강한 날에는 갑이었다가 아플 때는 을이 되는 유연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유머는 때때로 가장 부드러운 피드백이다. 심리학
우리 사회에서 ‘공정’은 약방의 감초처럼 거론되지만 합의하기 어려운 주제다. 입시와 채용, 부동산과 세금, 병역과 복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적 주제의 중심에는 공정성 논란이 도사리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국민 다수가 공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공정한 것인지를 두고는 첨예하게 대립한다. 공정은 다양하게 해석되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정 논란이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회의 부족일 것이다.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면서 좋은 대학, 안정적인 직장, 내 집 마련의 기회 등에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한 사람의 합격은 다른 사람의 탈락을, 나의 아파트 당첨은 수많은 사람의 좌절을 의미한다. 공정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결과보다 절차의 공정성을 더욱 중히 여긴다. 국민들은 과정이 투명하고 규칙이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면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규칙이 일부에게만 유리하게 작동한다고 느끼는 순간 많은 사람은 분노한다. 세대 간 공정 인식의 차이도 갈등을 증폭시킨다. 청년 세대는 출발선의 평등을 강조한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배경이 자신들의 미래를 좌우하는 현실에
오늘날 사회는 정보를 독식한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이들은 사회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발전을 이끄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득권 독점과 불평등 심화를 초래하게 되어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엘리트 집단의 구조적 문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엘리트는 능력보다 배경과 자본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 명문대 중심의 학벌 구조,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교육 기회의 차이, 특정 계층 중심의 정치, 경제 네트워크는 사회 계층 이동성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결국 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제도를 설계, 활용하고, 국가는 공정한 사회를 표방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공정한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뚜렷하다. 입시 경쟁은 점점 과열되고 있지만 사다리는 걷어찬 지 오래고 사교육 자본을 가진 계층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 정치권 역시 특정 대학과 지역 중심의 네트워크 구조가 반복되며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대기업 중심의 시장 구조가 강화되며 청년 세대의 기회가 축소되고 있
가끔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유튜브를 즐길 때면 유사한 제품과 비슷한 영상의 홍수 속에서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는 결정장애를 앓는다. 그럴 때마다 처음에는 ‘참 편리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고르기 시작하지만 점점 인터넷에 할애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누군가 나를 지켜보며 조종하는 듯한 느낌에 빠져든다. 우리는 자녀에게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를 ‘취향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믿는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소비할지 선택하는 주체는 언제나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믿음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넷플릭스의 추천 목록, 유튜브의 자동 재생, 쇼핑 플랫폼의 개인화 광고 속에서 우리의 선택은 과연 얼마나 자율적인가? 추천 알고리즘은 편리함을 약속한다. 수많은 콘텐츠와 상품의 홍수 속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찾아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원한다’는 감각 자체가 알고리즘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거의 클릭이나 시청 기록에 기반해 제시된 목록을 접하며 “역시 내 취향이야”라고 말하지만, 그 취향은 이미 데이터로 환원된 과거의 나를 반복 재생하는 구조 속에서 강화된 결과일 뿐이다. 이 과
베이비부머 세대가 은퇴기에 접어들었다. 정말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오늘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은퇴’를 끝으로 여기는 삶의 문법에 익숙하다. 오랜 세월 직업과 역할 중심으로 달려온 우리에게 퇴직은 마침표로 느껴지기 쉽다. 그런데 그 마침표 이후의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 준비되지 않은 긴 시간은 축복이 아니라 지루한 외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은퇴 후의 ‘버킷리스트’가 단순한 소망을 나열한 유행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도구라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할 사람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자존감이 흔들리고 무력감이 찾아온다. 버킷리스트는 바로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적극적 선언이며, 미래를 향한 능동적 설계도다. 버킷리스트의 첫째 기능은 삶의 방향성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직업 중심의 정체성이 사라진 뒤에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자기 효능감과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며 자신을 다시 삶의 주체로 서게 한다. 여행지 몇 곳을 적는 단순한 목록을 넘어, 배우고 싶었던 악기, 다시 시작하고 싶은 공부,
100세 시대, 퇴직 후 시간은 역할을 상실한 잔여 인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다. 나는 주위의 다양한 삶을 통해 중노년기 삶은 얼마를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삶의 주요 요소들에 대한 비움과 재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노년기에 있어 건강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인 것 같다. 젊은 시절, 건강이 ‘성취’라면, 이때의 건강은 ‘협상’이다. 신체는 더 이상 무한히 복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무리한 도전보다 지속 가능한 리듬이 중요하다. 규칙적인 수면, 균형 잡힌 식사, 적정한 운동은 삶의 독립성을 지키는 최소 조건이다. 특히 근력과 정신건강의 유지는 단순한 체력이 아니라 존엄의 문제다. 타인의 도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신체적 자율성은 곧 심리적 자율성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또한 관계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는 양보다 질이 중요해진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소진을 야기한다. 상호 존중과 정서적 안정을 주는 밀도 있는 관계에 집중하고, 의무감만 존재하는 관계는 정중히 거리를 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우자와의 관계 역시 ‘역할’ 중심에서 ‘동반자’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녀가 독립한 이후, 부부는 다시
얼마 전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한 친구의 무례한 태도로 마음이 몹시 상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일을 더 이상 키우고 싶지 않아 나는 애써 참아 넘겼다. 다음 날 그 친구는 나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하려는 듯 전화를 했지만 정작 전날 무례한 행동에 대해선 사과 한마디 없이 너스레만 떨었다. “미안해” 이 한마디는 그리도 끄집어내기 힘든 단어였을까? 사과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행위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자주 지연되고 회피된다. 우리는 변명을 먼저 떠올리고, 상황을 설명하며, 때로는 상대의 오해라고 퉁 친다. 사과를 미루는 동안 관계는 서서히 금이 간다. 그렇다면 사과가 어려운 이유는 개인의 성격 문제일까, 아니면 인간 존재의 구조적 문제일까? 사과가 어려운 첫째 이유는 자아의 방어 때문일 것이다. 사과는 단순히 “잘못했다”는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나는 틀릴 수 있는 존재다”라는 선언에 가깝다. 이는 우리가 오랫동안 쌓아온 자아 이미지-성실한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 괜찮은 사람-에 흠집을 낸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말한 ‘방어기제’처럼, 인간은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기보다 합리화와 부인을 먼저
어느새 다시 세모다. 연초 의미심장하게 계획한 것 중에 실천한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올 한 해도 여느 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자책에 잠시 돌아본다. 계획을 세우는 나는 훌륭하다. 그는 부지런하고, 합리적이며, 미래를 믿는다. 그에게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다. 일찍 일어나고, 커피를 줄이며, 미루지 않고, 삶을 정돈한다. 계획하는 나는 절제와 균형, 자기 통제를 신봉하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다. 문제는 실천하는 나다. 그는 계획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알람은 울렸으나 그건 사회의 강요일 뿐이고, 운동을 가야 하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 가기 싫다고 한다. 계획하는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줄 알지만, 실천하는 나는 현재의 나를 위해 미래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내일부터 진짜 하면 되잖아” 이 말은 실천하는 나의 핑계이자 좌우명이다. 두 사람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다. 계획하는 나는 칸트처럼 의무와 원칙, 보편적 도덕을 말한다. 반면 실천하는 나는 에피쿠로스적이다. 쾌락을 선호하고, 고통을 피하며, 당장의 만족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둘은 늘 싸운다. 계획은 명령하고, 실천은
지난주에 일상에 지친 아내의 간절한 요청으로 괌을 여행했다. 그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마주한 황홀한 석양을 보고, 어느새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보랏빛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사진만 찍고 있는 내 모습을 마주하며, 문득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니면 기록하기 위해 소비하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힐링의 시간을 사진에 연연하여 절묘한 감동을 놓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살아가는 일’보다 ‘기록하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경향이 있다. 스마트폰은 늘 손에 있고 SNS는 우리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소환한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절친을 만나는 때조차도 우리는 먼저 카메라 앱을 켠다. 이른바 기록 강박이 조용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물론 기록은 나쁘지 않다. 사진은 기억을 더 선명하게 살려주고, 잊혀가는 순간들을 다시 불러오는 힘이 있다. 문제는 그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순간이다. 즐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남기기 위해 순간을 연출할 때, 우리의 삶의 방향은 아주 오묘하게 전도된다. 살아가는 주체가 아닌, 카메라 앞에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