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다시 세모다. 연초 의미심장하게 계획한 것 중에 실천한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올 한 해도 여느 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자책에 잠시 돌아본다.
계획을 세우는 나는 훌륭하다. 그는 부지런하고, 합리적이며, 미래를 믿는다. 그에게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다. 일찍 일어나고, 커피를 줄이며, 미루지 않고, 삶을 정돈한다. 계획하는 나는 절제와 균형, 자기 통제를 신봉하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다.
문제는 실천하는 나다. 그는 계획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알람은 울렸으나 그건 사회의 강요일 뿐이고, 운동을 가야 하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아 가기 싫다고 한다. 계획하는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줄 알지만, 실천하는 나는 현재의 나를 위해 미래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내일부터 진짜 하면 되잖아” 이 말은 실천하는 나의 핑계이자 좌우명이다.
두 사람은 모두 내 안에 존재하지만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다. 계획하는 나는 칸트처럼 의무와 원칙, 보편적 도덕을 말한다. 반면 실천하는 나는 에피쿠로스적이다. 쾌락을 선호하고, 고통을 피하며, 당장의 만족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둘은 늘 싸운다. 계획은 명령하고, 실천은 변명한다. 계획은 말한다. “이건 너 자신과의 약속이야.” 실천은 대답한다. “약속도 상황 봐가면서 지켜야지.”
우리는 이 싸움에서 실천하지 못한 자신을 의지가 약하고 게으르며 자존감이 낮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왜 우리는 계획하는 나를 ‘진짜 나’로 여기고, ‘실천하는 나’를 자책할까? 실천하는 나도 분명 나다. 오히려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함께 버티는 쪽은 후자다. 피곤을 느끼는 쪽도, 귀찮음을 견디는 쪽도, 불확실한 오늘을 살아내는 쪽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흄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보다 습관에 의해 움직인다. 그렇다면 계획하는 나는 이성의 목소리이고, 실천하는 나는 습관의 총합이다. 이성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걷는 건 다리다. 다리가 아프면 아무리 멋진 목적지도 소용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목적지를 너무 자주 바꾸고, 다리는 쉬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계획은 종종 자기기만이 된다. 오늘의 나를 과대평가한 채 내일의 나에게 부채를 넘기는 행위. ‘내일부터’라는 말은 사실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사과문이다. 하지만 그 사과는 늘 같은 주소로 배달된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또다시 현재의 내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에게 연체 이자를 물린다.
이 둘을 화해시키는 것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데서 시작된다. 계획은 조금 덜 거창하고, 실천은 조금 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하루 한 페이지, 10분, 딱 하나. 실천하는 나에게는 위대한 비전보다 구체적 타협이 더 설득력 있다.
어쩌면 성숙이란 계획을 완벽히 실천하는 실행력이 아니라, 이를 수정해도 자책하지 않는 너그러움일 것이다. 우리는 둘 이상의 나로 이루어진 존재다. 계획하는 나와 실천하는 나, 이상을 바라보는 나와 현실을 사는 나. 이들이 완전히 일치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가끔은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는 있다.
오늘도 나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내일도 다 실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괜찮다. 둘이 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니까. 그 자리에서 비로소 삶은 계획이 아니라 조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