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의회는 의석수 58:2:1로 국민의힘이 절대다수인 광역의회이다. 12일 경북도의회는 독도에서 열기로 한 본회의를 취소했다. 애초 채택하기로 했던 독도수호결의안 채택마저 무산시켰다. 이에 배한철 경북도의회의장은 "지금은 한미일이 공조해야 하는 상황에서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독도에 가지 않기로 했다"며 "한일관계가 잘 풀려나가는데 독도수호결의안을 굳이 채택할 필요가 있느냐"고 밝혔다. 불과 2개월 전 4월, 배한철의장은 성명을 통해 "일본이 외교청서를 통해 독도에 대한 부당한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하는 행태를 270만 도민과 함께 강력히 규탄한다"며 "일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진정한 반성의 자세로 양국의 협력관계 회복에 적극 나서라"고 촉구했다. 알다시피 경북도의회는 경북 울릉군의 부속섬인 독도를 두고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 ‘대마도 실지회복을 위한 촉구결의안’까지 추진했던 전력이 있다. 때문에 경북도의회에는 ‘독도수호특별위원회’가 따로 구성되어있기까지 하다. 그런 입장이 두 달 만에 뒤집혔다. ‘쪽’팔리는 노릇이다. 경북도의회의 입장전환이 뭐그리 큰 의미이겠는가? 대통령이 나서서 강제징용배상문제를 우리 기업 돈걷어서 해결해주는 것으로
며칠 전 밤에 귀가를 위해 내리막 도로를 운전하는데 갑자기 ‘펑’하는 굉음에 차를 세웠다. 이미 차는 정상적인 주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덜컹거리고 있었다. 겨우 갓길에 주차하고 살펴보니 오른쪽 바퀴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 이물질에 타이어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일단 차를 옆으로 옮기고 보험사 긴급출동을 불렀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 끝에 긴급출동 기사가 도착해 차를 살피고 있는데 경찰 패트롤카가 왔다. 정신없는 와중에 대뜸 음주측정기를 들이밀었다. 차가 어떤 상태인지 살핀 후에 하자고 하니 막무가내였다. 결국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공무집행 중이니깐.. 비상타이어로 교체하고 현장을 벗어난 후, 다음날 앞바퀴 두 쪽을 모두 교체한 뒤에야 상황이 종료되었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종료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찰의 대응이 못내 아쉬웠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선후가 어긋났다는 느낌이었다. 수습을 돕고 난 이후 음주측정을 해도 될 문제였다. 화투패를 거꾸로 치는 경우가 어디 경찰 뿐이랴? 5월 10일로 취임 1년을 지난 윤석열정권. 대한민국의 지난 1년은 말 그대로 나락을 향한 폭주였다. 내리막길에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다. 말이란 새어나가게 마련이니 그만큼 말조심하라는 뜻이겠다. 늘 이놈의 새나 쥐가 골치였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무슨 일을 처리할 때 아예 “쥐도 새도 모르게”하라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쥐나 새가 우글거리는 동네에 살면서 모르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인데.. 애초 미군기지 바로 옆으로 대통령실을 옮길 때 야당에서 보안관련 우려를 제기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알다시피 미국은 도청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전력이 화려하다. 2013년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전직 미국 국가안보국(NSA) 계약요원 스노든의 기밀자료 폭로사건이 있었다. NSA와 영국의 GCHQ 등 정보기관들이 전 세계에 걸쳐 무차별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 사찰해온 사실을 드러낸 것이었다. 스노든 사건으로 전 세계에서 비난이 빗발치자 미국 클린턴 국무장관은 “우리만 정보 수집하냐? 다들 미국 정보에 의지해놓고 이제와서 왜 이러냐?”식으로 반응했다. 당시와 지금의 차이는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이었다.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을 미국의 이익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초점 지역으로 분류하고 미군 기지와 공관에 특별정보수집부를 설치하고 전방위적으로 도청 활동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담함을 넘어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여기저기 신문에 칼럼이랍시고 잡문을 끄적이면서도 ‘이런 글이 세상에 어떤 보탬이 되는가’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속칭 ‘검사정권’, ‘검찰왕국’ 치하에서 살아내기가 여간하지 않은 탓이다. 자기들만 가장 똑똑하고 정의로운 초엘리트집단이라 여기며 전횡을 휘두르는 형세는 그래, 집권했으니 권력놀이 한다고 치자. 또 정적제거에만 혈안이 된, 차마 두 눈뜨고 못봐줄 국내정치는 차라리 눈감으면 된다고 여기자. 그런데 3.1절 기념식에서 일제강점도 우리 탓이요, 침략자들은 이제 글로벌 협력파트너가 되었다고 하는데서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버렸다. 허나 이건 예고편에 불과했다. 강제징용배상문제마저 우리 기업 돈 걷어서 해결하겠다니 도대체 대한민국에 주권이 있기나 한 것인지 분노를 넘어서 부끄럽기가 이를데 없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 국권찬탈을 항의하는 불길이 타오르자 조약체결을 이끌었던 학부대신 이완용은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이런 망발을 지껄였다.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2018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조사단’이 충남 아산시의 야산 중턱을 파헤쳤다.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유해 208구를 수습했다. 어른 유해 중 85%가 여성이었고, 나머지 58구는 어린이였다. 현장에는 부녀자들이 착용했던 비녀와, 구슬 같은 아이들 장난감이 드러났다. 난리통에 남자들은 어디론가 흩어지고 남은 여성과 아이들이 구슬을 손에 움켜쥔 채 군인들의 보복살인에 쓰러진 것이다. 집단광기가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한 현장. 끌려가다 콩밭에 아기를 안고 몸을 던져 겨우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살았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평생의 트라우마와 한으로 온전히 숨쉬기조차 버거운 한평생이었다. 전쟁이라서 그랬다고? 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지난 현실에서도 엄연히 학살은 일어난다. 2019년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을 개혁하고자 나선 법무부장관의 가족을 향해 검찰이 벌인 가혹한 수사를 떠올리면 나는 ‘학살’이란 표현 이외에 다른 단어를 찾을 수 없다. 무차별적인 압수수색, ‘딸의 어릴 적 일기장을 뒤지고 봉사활동 시간을 추적하는가 하면 생활기록부까지 까발리던 일을 떠올리면 ‘사냥’이란 말밖에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알량한 표창장을 빌미로 엄마
흔히들 우리나라 국민들을 두고 국난극복이 취미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조상들부터 그랬다. 왕조시대 국왕이 의주까지 내뺐어도 백성들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일본에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쳤어도 만주에서 총들고 싸운건 국민들이었다. 독재정권에 목숨걸고 저항해 민주화를 이룬 풀뿌리 민중들이었으며, 나라가 부도났을 때 금가락지 빼서 보탠 건 권력하나 쥐어보지 못한 장삼이사 국민들이었다. 이런 국민들에게 27일 윤석열대통령은 점잖게 한마디 하셨다. “국민이 어려울 때 나라가 돕고, 나라가 어려우면 국민이 헌신하는 국가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한마디만 하자. “대한민국은 나라만 잘하면 된다. 국민 탓하지 마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제 대통령이 내뱉는 말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워낙 실언이 잦은 터라 본인 스스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미를 알고 하는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위의 발언도 대통령이 단 하루도 들어가지 않겠다던 청와대 영빈관에서 행안부, 통일부 등의 업무보고를 받는 와중에 한 말이다.(하긴 요즘 부쩍 청와대 사용이 잦다. 그럴꺼면 뭣하러 수천억 들여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뻘짓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대통령의
한 독일인이 있었다. 21세 약관의 나이에 베를린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명한 신학자 칼바르트는 그가 쓴 박사학위논문을 “신학적 기적”이라 평할만치 세상은 천재의 출현을 반겼다. 24살에 베를린대학 신학부 교수가 되고 25살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촉망받는 신학자이자 목사로서의 삶은 27살 나치가 집권하면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의 많은 교회들이 히틀러를 그리스도에 비유하며 우상숭배에 휩쓸리자 그는 히틀러에 반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고백교회운동의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 그가 나치에 저항하는 활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던 그는 망명권유조차 거부한 채 활동을 이어가다 1943년 4월 결국 체포되어 히틀러암살모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독일패망 한 달 전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의 이름은 ‘디트리히 본회퍼’이다. 시무식에서 찬송가를 불러 종교편향 논란을 불러일으킨 김진욱공수처장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연일 공수처장 사퇴를 압박하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공수처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다. 공수처장이 부른 찬송가는 본회퍼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둔 1945년 약혼녀에게 보낸 ‘선한 능력으로’라는 시에 곡을 붙인
지난 23일은 내가 30년 철도기관사생활을 끝내고 마지막 열차를 운행하는 날이었다. 이제 연말까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유급휴일이다. 퇴근하며 주변사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데 후배인 모팀장이 잔뜩 미안한 얼굴로 말을 건넨다. “형님, 저.. 내일 혹시 승무가능하십니까?” 사연인즉 며칠전 사무소에 코로나환자가 5명이나 발생하여 인력이 태부족이란다. “아무리 짜내도 탈 사람이 형님밖에 없습니다” 애원하는 후배의 말에 차라리 웃으며 답했다. “그래, 퇴직하면 실컷 놀건데 뭐..”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저녁, 나는 부산신항만으로 출근해 33량 컨테이너열차를 경부선으로 끌고 나갔다. 등뒤에서 쿵쿵거리는 디젤기관차의 엔진소리가 정겹다. 기관차위에서 흰머리소년이 될 때까지 보낸 지난 세월처럼 남성현터널 주변에는 흰 눈이 쌓여있다. 돌아보면 대한민국의 역사만큼 철도도 격변의 시기였다. 124년의 철도역사를 거슬러 100년 동안 바뀐 것보다 최근 20년 동안 바뀐게 더 크다고 할 정도였으니.. 처음 입사했을 때는 한 달에 온전한 휴일 하루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군대막사 같은 곳에서 잠시 눈 붙이고 근무 나가기 일쑤였던 처지에서 지금은 매월 8~10일의
12월 2일 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대표팀이 포르투갈과 맞붙는 시간을 앞두고 저녁반주에 얼콰해진 나는 고민했다. 축구를 볼 것인가? 잘 것인가? 당일로 예정된 철도노조의 파업은 잠정합의가 나와 철회되었다. 고로 내일 새벽 예정된 기관차승무를 위해 출근해야 한다. 잘 시간도 문제지만 더 큰 고민은 지금껏 대한민국 축구가 중요한 경기에서 내가 중계를 지켜볼 때 이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 축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끊기 힘든 응원유혹이지만 차라리 안보는게 우국충정이니 이 징크스를 익히 아는 지인은 술먹고 일찍 자란다. 그래,. 애국하는 심정으로 잤다. 현실은 늘 드라마보다 극적이라더니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대한민국을 또 한번 구한게야”라는 뿌듯함을 얻었다. 그날 새벽부터 지금까지 뉴스는 태반을 붉은악마들의 기적이 차지했다. 마치 월드컵경기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냈나 싶을만치. “그래, 월드컵이니깐..”하면서도 지나친 들뜸을 스스로 경계하게 되는 것은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미안함 때문이다. 솔직히 파업철회 소식에 내 가슴은 물먹은 솜마냥 무거웠다. 파업현장에 고립된 채 홀로 십자포화를 견뎌야 할 화물연대조합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추가 업무개시
그저께 저녁 나는 부산신항만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운행할 예정으로 출근했다. 예정대로라면 30량 전후의 수출용 컨테이너화물을 거대한 부두로 몰고가서 한 켠에 있는 철도전용선(철송장)까지 밀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새벽 3시에 일어나 다시 기관차로 철송장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수입컨테이너를 수십량 물고 전국 각 지역으로 운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저께 근무를 할 수 없었다. 화물연대파업으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가던 물류의 한 축이 빠지자 철도운행까지 영향을 끼쳐 일부 열차의 운행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올 12월말로 퇴직예정인 철도기관사다. 12월 근무일정표를 보니 12일만 근무하게끔 되어있다. 그야말로 말년이니 한 번의 근무마다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데, 12월2일부터 철도파업이 예정되어 있다. 파업이 얼마동안 이어질지 알 수 없다. 나는 과연 퇴직 전 마지막 열차에 오를 수 있을까? 파업만 들어가면 앵무새처럼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응한다”는 윤석열정권이기에 어쩌면 그 열차는 벌써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떠나버렸을지도 모를 마지막 열차가 어디 나 뿐일까? 윤석열정부는 화물연대 파업에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이라는 해괴한 괴물을 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