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뜨거운 여름이었다.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지나니 뜨거운 태양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밀려온다. 조금 선선해진 틈을 타 오늘은 멀리 전주향교로 여행을 떠나보자. 전주향교는 고려말 창건 후 몇 번의 이사를 하게 된다. 처음 창건위치는 경기전 근처였으나 향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여 황하대 아래로 옮겼다.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선조36년(1603)에 순찰사 장만이 중심이 되어 옮겨졌다. 따라서 최종위치로 옮겨진 것을 기준으로 하면 약 415년, 황하대 아래로 옮겨진 것을 기점으로 하면 약 608년, 고려말 창건을 기준으로 하면 약 66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향교이다. 전주향교의 여행은 골목 입구의 홍살문과 하마비로부터 시작한다. 골목입구에 위치한 홍살문과 하마비는 자칫 놓치기 십상이나 반드시 챙겨봐야 할 요소이다. 홍살문은 향교가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곳부터는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을 가다듬고 진입하라는 의미이다. 홍살문 우측에 하마비가 우뚝 서있다. 위로 길쭉한 형태이며 옆면이 약간은 두꺼운 모습이다. 중간 아래 부분으로는 약간 거무스름하게 변해있다. 아마도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전주향교의 하마비에
지난 시간에 이어 조선 황제릉으로 여행을 이어가보자. 홍릉의 이빨 빠진 사자의 모습을 떠나 해치상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목에 방울이 있어 비로소 ‘아, 이게 해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홍릉의 해치는 날카로운 이빨 대신 사각형의 토끼 이빨을 드러내놓고 있다. 기존 왕릉에서 만나던 석마는 반가운 마음이 앞서 다가서지만 코를 벌렁거리며 반항적인 모습에 깜짝 놀란다. 문무석인 뒤에 놓여 순종적이던 석마는 이젠 반항적인 모습으로 참도의 맨 끝에 자리하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일직선상으로 나 있는 참도는 2단에서 3단으로 변해있다. 3단의 참도는 황제의 참도이다. 가운데 한단 높은 길이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신도이고 좌우는 황제와 제후국의 왕이 다니는 길이다. 3단의 참도 끝에 위치한 건물은 침전이다. 보통 왕릉에는 정자각이 자리하지만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인 침전을 세웠다. 침전은 황제의 숙소라는 뜻이다. 이 건물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궁궐의 전각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중국에서는 능이란 황제가 죽어서도 나라를 통치할 지하궁전이라 믿었다. 그래서 중국 황제능을 본떠 만든 홍릉과 유릉에는 침전이 있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왕릉의 정자각과는 그 용
요 며칠 새 경복궁 갈 일이 많아졌다. 경복궁 끝자락에 위치한 건청궁을 드나들면서 문득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는 곳이 궁금해진다. 오늘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그리고 그 가족이 함께 잠들어 있는 홍유릉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금곡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홍유릉은 고종과 순종, 두 황제의 능이다. 홍릉과 유릉은 왕릉이 아닌 황제릉에 해당한다. 따라서 다른 왕릉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구조가 다르다. 고종황제는 합일합방 후 191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황제의 능을 현재 위치로 결정하게 되자, 터가 좋지 않다고 천장설이 끊이지 않았던 명성황후의 홍릉도 이곳으로 옮겨와 합장릉을 만들었다.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호이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을 이왕가로 격하시켜 버린 일본은 고종의 능호를 따로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종이 능호를 쓴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성황후와 합장하고 홍릉이라는 능호를 쓰게 되었다. 많은 사건을 겪어내고 끝내 나라가 망하는 것까지 봐야 했던 고종, 고종황제가 능호를 갖는 방법은 이미 정해진 황후의 능호를 함께 쓰는 방법 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
지난 여행에 이어 이번 여행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떠나보자. 국립서울현충원이 자리한 곳은 조선시대 창빈 안씨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즉 국립서울현충원의 원주인은 창빈 안씨인 셈이다. 창빈 안씨는 궁녀출신으로 중종임금의 후궁이 되었다. 슬하에 영양군과 덕흥대원군, 정신옹주 등 2남 1녀를 두었다.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부친이시다. 즉 창빈 안씨는 선조의 할머니이며, 선조의 할머니 묘소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자리해 있는 것이다. 장중한 느낌의 창빈 안씨 신도비를 지나 창빈 안씨의 묘역에 오른다. 곡장으로 둘러싸인 묘역은 엄마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다. 이곳은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으로, 능침 앞으로 묘비와 장명등이, 좌우로는 망주석과 문무석인이 자리하고 있다. 창빈 안씨의 묘소 주변에 국가원수 묘가 자리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총 4분의 대통령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 초대 대통령이셨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현충원의 가장 높고 깊숙한 곳에 자리한 묘역이 박정희 대통령의 묘역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묘역은 육영수 여사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장례식 때 사용되었
전 국무총리였던 유명정치인 JP가 별세했다. 정부에서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묘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JP가 거절한 현충원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6월은 호국의 달이기도 하여, 오늘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1955년에 국군묘지로 출발한 현충원은 1996년 국립현충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6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다시 한번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울 동작동에 위치한 서울현충원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계신 성지이다. 현충원에 도착하면 먼저, 참배부터 하자. 좌우로 귀빈실과 안내실을 갖추고 있는 현충문을 통과하면 서울현충원의 상징 현충탑을 만난다. 동서남북 네 방향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十(십자)형 탑 앞에는 제단이 놓여있다. 제단 앞에는 향로와 향합대가 놓여있다. 제단 앞에서 지금의 평안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해준 모든 분들을 위해 묵념을 한다. 묵념 후 탑 좌우로 시선을 돌리니 탑의 좌우로 애국투사상과 호국영웅상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조용히 잠들어 계시지만 나라를 위해 활동하실 때는 이 영웅상들보다 더 기개가 충만했으리라…. 탑의 내부에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는 그 사람의 그릇의 크기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우리 지역을 이끌어갈 사람은 어느 정도의 그릇을 가진 사람인지 잘 판단해야 할 시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최초로 토기가 등장했던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를 만나러 여행을 떠나보자. 1925년 서울 한강에 큰 홍수가 나면서 암사동에서 한 무더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였던 당시에는 토기에 대한 관심은 도자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암사동과 빗살무늬토기는 해방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의 관심 속으로 등장한다. 점과 선을 이용한 다양한 무늬장식을 한 빗살무늬토기. 오늘은 암사동 선사유적지 5호 집터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를 만나보자. 빗살무늬토기는 생김새가 아주 독특하다. 그릇의 바닥면이 평평하지 않고 뾰족한 모습이다. 이렇게 아래가 뾰족한 모습의 토기를 첨저형 토기라고 한다. 첨저형 토기는 워낙 독특한 모습이라 빗살무늬토기 하면 의례 첨저형 토기만 생각하지만 보통의 그릇처럼 평평한 모습의 빗살무늬토기도 있다. 그런데 빗살무늬토기는 왜 밑이 뾰족할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모래나 땅 속에 쉽게 파묻게 하기 위해서이다. 뾰족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연일 화제다. 각 나라 정상들의 뉴스를 접하다보니 청동기시대의 문화유산인 농경문 청동기와 조선시대 국왕의 의례 중 하나였던 친경례가 생각난다. 오늘은 농경문 청동기와 친경례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농경문 청동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실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꽤 알려진 문화유산이라 사실 실물을 접하면 생각보다 작은 사이즈에 꽤나 당황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농경문 청동기는 양면에 당시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한 면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 즉 솟대가 그려져 있다. 솟대가 그려진 반대편에는 3명의 사람이 새겨져 있는데, 한 명은 항아리에 두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며, 또 다른 한 명은 괭이를 높이 들어 땅을 내리치려는 듯한 모습이다. 마지막 모습의 사람은 따비로 밭을 가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농기구인 따비와 괭이가 눈에 띈다. 놀라운 것은 괭이의 모습이다. 청동기시대의 괭이의 모습이 현재 구입 가능한 괭이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 오래된 시기에 사용하던 농기구가 현재의 농기구와 같은 모습이라니 참 놀라운 디자인이다. 이
계절의 여왕 5월이 시작되었다. 여기저기 꽃들이 피고 지며 하루하루 나뭇잎이 무성해지는 계절이다. 계절에도 여왕이 있듯이 역사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 있었다. 바로 신라 선덕여왕이다. 오늘은 선덕여왕의 흔적을 따라 분황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분황사는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세운 절이다. 그런데 다른 절과는 달리 분황사의 이름이 아주 독특하다. 분황사는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라는 뜻이다. 보통 일반사찰이 불교의 교리를 사찰의 이름으로 짓는 데 비해 그 뜻이 사뭇 다르다. 여기서 ‘황제’는 선덕여왕이리라. 그런데 ‘황제’라는 단어 앞에 ‘향기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왜일까? 어쩌면 당태종의 모란꽃 그림에 관한 일화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당태종은 선덕여왕에게 나비가 없는 모란꽃 그림을 선물로 보내왔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당태종이 자신을 향기 없는 여자에 빗대어 조롱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하지만 모란꽃은 향기가 있는 꽃이어서 당태종의 모란꽃 그림에 대한 선덕여왕의 판단은 오해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분황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분황사 석탑이다
백범기념관은 효창공원 내에 있다. 효창공원은 원래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역인 ‘효창원’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문효세자의 묘소는 서삼릉으로 옮겨지고 ‘효창원’은 ‘효창공원’으로 변경되었다. 해방 후 삼의사 묘역과 임정요인 묘역으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효창공원 하면 백범기념관과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떠오른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백범기념관과 효창공원에 자리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보자. 백범 김구 선생의 중국 내 이동경로를 따라 2층 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2층 전시관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사진과 태극기로 시작한다. 기념사진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보지만 평소 알고 있던 모습만 가지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이 적힌 패널을 보고서야 백범 김구 선생은 맨 앞줄에 자리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전시내용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이다. 상하이 교민들을 보호하고 임시정부를 지키며 밀정을 찾아내서 처단하는 업무를 총괄하는 경무국장시절의 김구 선생도 만날 수 있고, 지금의 행정안전부 장관과 비슷한 내무총장 시절의 김구 선생도 만날 수 있다. 독립운동가 나석주 선생이 김구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다. 오늘은 백범 김구 선생님을 만나러 백범기념관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1·2층으로 구성된 백범기념관은 김구 선생의 출생부터 1949년 서거할 때까지의 전 생애가 잘 정리되어 있다. 1층의 중앙홀로 들어서면 흰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계신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날 수 있다. 백범좌상이다. 흰 옷을 입은 채 안경까지 쓰신 백범선생의 좌상을 마주하면 왠지 모를 애국심이 마구 솟아오른다. 김구 선생은 조선이 개항을 하게 된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 알려진 ‘김구’라는 이름을 얻기 전까지 백범 선생은 수차례 이름을 바꾼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김창암이었다. 18세 동학에 가담한 뒤로는 이름을 ‘창수’로 변경하였으며, 39세에 이르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은 ‘구(九)’, 호는 ‘백범(白凡)’으로 바꾼다. 1층의 전시실은 영상과 사진 등을 통해 김구선생의 어린 시절과 동학운동, 치하포 의거 등 구국운동에 대해 전시되어 있다. 그럼 1층에서 만나는 김구 선생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영상실에서는 백범김구 선생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