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는 육체적, 정신적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즈음에는 걱정이 태산 같다. 진통을 겪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진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예수) 고통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은 첫째로 자신의 고통보다 더 큰 남의 고통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리는 것이며, 둘째로 고통에 대처하는 데는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나쁜 방법과 조용히 견디며 인내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성장해 간다. 즉 각자의 사상 속에는 이미 더욱 높은 사상이 들어있다. 지금은 어떤 성격을 나타내는 사람 속에도, 이미 더 높은 성격이 완성되어가고 있다. 청년은 유년 시절의 어린아이 같은 몽상을 버리고, 장년은 청년 시절의 무지와 거친 혈기를 버리고, 노인은 장년의 아욕(我慾)을 버리며 점점 우주적인 정신을 배워간다. 그리하여 그는 더 높고 더 강한 인생의 기반에 서게 된다. 외적인 관계와 조건은 서서히 소멸하고 더욱더 신 속에 몰입하면서, 신도
1. 2011년 일본 북동해안에서 진도 9.0의 강진이 일어났고, 10m에 달하는 쓰나미가 밀려왔다. 쓰나미는 미야기, 이와테, 후쿠시마현 등을 휩쓸었고,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됐고, 대략 25,000명 넘는 인원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고베 대지진 이후로 다시 한번 일본을 덮친 끔찍한 재난이었다. 재해 복구 예산이 무려 250조 원이 넘는다는 엄청난 피해 앞에 일본 전역은 깊은 시름과 비통함에 잠겼다. 그런데 쓰나미가 빠져나간 뒤, 리쿠젠타카타 시를 찾은 조사관은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바닷가에 심어진 7만여 그루 소나무가 모두 끝장난 상황에서 그야말로 낙락장송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높이도 27.5m에 달하며, 수형도 아주 예쁘고 우뚝한 소나무는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일본인들은 그 나무를 기적의 소나무라 부르며, 어떤 재난에도 굴하지 않는 일본의 대화혼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그런 희망과 상징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은 헛된 꿈이었다. 쓰나미로 몰려온 바닷물이 뿌리를 완전히 침식해서, 소나무는 형체만 남아 있을 뿐, 이미 죽은 고사목이란 판정이 나오고 만 것이다. 섬겨야 하는 신(かみ)이 팔백만이나…
영어를 모르면 한국서 어찌 살까? 국제규격에 알맞은 지식수준을 가졌음을 자랑하고 싶어서일까. 영어단어가 거리에서도 춤춘다. 영어를 한글로 쓰기도 하고, 영문자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의미 없는 국적불명 말도 와글거린다. 언어의 속뜻을 공부하는 필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드물지 않다. 오늘의 주제는 ‘거리의 언어학’이다. 얼치기 영어가 거리를 질주하도록 방치되고 있다. 국어 버리고, ‘영어’를 수학과 함께 ‘필생의 과업’으로 삼는 나라의 영어 실력이 이 정도인가. 자동차 뒷 유리창에 세련된 디자인의 ‘baby in car’(베이비 인 카)라는 커다란 글자 스티커가 붙어있다. 차안에 아기가 있다는 말일까, 뜻만 통하면 된다고? 용(龍)과 드래곤(dragon)을 같은 단어로 아는 사람들의 평면적인 생각이다. 용은 드래곤이 아니다. 한국어로 외국어를 생각한다. 비교언어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영어의 명사(noun)에 ‘a’ 또는 ‘the’ 같은 부정관사(不定冠詞)나 정관사가 꼭 붙는 것을 모든 학습자는 영어 공부 초기에 꼭 배운다. 잊었을까? 없으면 다른 뜻이 될 수도 있다. ‘baby’in(g) car’(베이빙 카)를 말하는 것이냐고 한 외국인이 농담처
인간의 감정과 행위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의 사상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사상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자신의 영적 본성과 그 본성의 요구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애의 각 시기는, 우리가 의식하는, 우리의 의지에 의해 수행되는 행위, 즉 결혼, 취직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이를테면 산책할 때, 한밤중에, 식사 중에 떠오르는 사상에 의해 결정되는데, 특히 과거 전체를 통틀어 우리에게 너는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해왔지만 좀 더 다른 행동을 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얘기해 주는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 그 경우 그 뒤의 우리의 모든 행동은 노예처럼 그 사상에 봉사하고 그 의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로) 인간이 그 앞에서 발을 멈추는 모든 사상은 그가 그것을 말하든 안 하든 반드시 그의 생활을 해치기도 하고 돕기도 한다. 죄악을 피하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죄악의 뿌리는 나쁜 사상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사색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소로) 우리는 돈이 든 지갑을 잃어버리면 아까워하지만
손흥민의 아버지다. 1962년생. 예순한 살. 환갑이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은퇴할 때까지는 매우 유능한 축구선수였다. 그 아들이 세계 최고의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먹었다. 나는 그 아버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자서전을 찾았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책을 펼쳤다.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다." 이 문장은 실은 성공한 아들들의 흔한 효도발언을 출판사가 광고카피로 뽑아 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초장부터 손웅정에게 빨려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칭 '마발이 3류 축구선수'가 쓴 이 책이 오늘 나처럼 부실한 가장들은 물론 이 해괴망측한 시대를 내리치는 죽비였기 때문이다. 한 마라토너가 2012년 12월, 스페인에서 열린 크로스컨츄리 경기에 출전하여 2위로 달리고 있었다. 선두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로 케냐의 아벨 무타이 선수. 그런데 그가 종점을 착각하여 멈추려 했다. 뒤따르던 스페인의 이반 페르난데스 아니야는 무타이를 추월하지 않고 손짓으로 결승점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가 금메달을 따도록 도와준 것이다. 이에 대하여 1등 할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했느냐, 고 묻는 기자에게 아니야가 답했다. "그가 이기고 있었을 뿐이
태어난 자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태어나 이름을 부여받고 열심히 살다가 늙어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삶의 과정을 보면, ‘생명체’와 ‘삶’이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표현의 차이에 불과하며, 또한 생명체의 삶이란 ‘생로병사’라는 말 안에 모두 담겨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것은 개체의 소멸이라는 죽음 자체가 생명 현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개인이 겪는 죽음이 생명 현상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면, 유한한 존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의문은 개인 차원 내지 층위를 달리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비록 나라는 개체는 특정일에 태어나 일정 기간 살다가 특정일에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이지만, 나를 있게 한 부모로부터의 생명의 힘이 있었듯이, 내 부모 또한 그 부모에 의해 존재할 수 있었다. 거꾸로 개인의 존재를 유지했던 생명의 힘은 당사자는 죽음으로 소멸되어도 자식을 통해 이어져 간다. 여성과 남성이란 성의 분화 형태는 있을지언정, 생명은 개체의 죽음 넘어 또 다른 탄생으로 끊임없이 지속되어 후손의 형태로 그 숫자를 늘려가며 다양하게 번창하는 모습이 있다. 아름다운 지구 생태계는 그 결과물이다. 이렇게 죽음과 탄생이
인간의 거의 모든 지식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게으름을 거들고 그것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배반하는 삶을 살아온 현대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이 가장 참된 삶이라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현재, 문화라고 불리고 있는 것, 즉 학문, 예술, 온갖 형태의 진보와 발달은 모두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기만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이가 어른을,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듯, 굶주린 군중이 생활필수품도 없어서 쩔쩔매고 있을 때 몇몇 사람들이 사치품에 싫증내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루소) 식인(食人)의 시대에는 강자가 약자를 먹었다. 단적으로 말해 약한 자의 살을 먹었다. 그 뒤 온갖 법률이 정해지고 온갖 학문이 발달했지만, 무자비한 강자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불행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착취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그 살코기를 먹지 않고 그 피를 마시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약자를 곤경과 궁핍에 빠뜨리면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가혹한 노동으로 몸을 망쳐가면서 한평생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
‘범죄도시 2’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영화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단기간에 천만 관객을 모은 것에 대해서도 하등의 불만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극중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아들과 납치된 남편의 여자 역(박지영)에 대해 일체의 말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좀 이상하게 생각한다. 박지영이 참 잘했다.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런데 포커스는 마동석에게만 맞춰져 있다. 최귀화나 박지환 같은 배우 등등 남자 배우들에게만 맞춰져 있다. 그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극중 캐릭터나 배우들의 평가에서 불평등한 점이 있다는 얘기이고 다소 쏠림 현상이 보인다는 얘기이다. 뭐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범죄도시 2’의 매력은 양가적(兩價的), 곧 이중의 가치에서 찾아진다. 우파들은, 다소 폭력적이긴 해도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는 데다 후배들이나 자기 경찰서 식구들은 무조건 감싸고 보는 마초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에 매료될 것이다. 남자라면 역시 저렇게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며 침을 흘릴 것이다. 극중 주인공 형사 마석도(마동석)는 ‘수사권이 없으니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징징대는 베트남 영사관 직원에게 말한다. “아 그러면 우리 국민들은 우리가 보호해야지 누가 합
학교에 떠도는 풍문 중에 ‘신도시 학교는 구도심 학교보다 학교 폭력 위원회가 훨씬 자주 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치원 시절부터 한곳에 살아서 학부모들끼리 안면이 있거나 아이들끼리 친분이 있는 경우라면 학교폭력 위원회까지 가지 않고 해결될 사안인데, 신도시에서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부모도 아이도 낯선 상태라 민감하게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신도시 학교와 구도심 학교의 학폭위 개최 건수를 통계로 확인하지 못해서 단순한 풍문인지 사실인지 모르지만, 교사들이 체감하는 횟수는 확실히 신도시 쪽이 많은 듯하다. 교사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 신도시에서 학폭 담당 업무를 몇 년 동안 연달아서 맡으면 과로사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걸 보면 그렇다. 새로운 곳에 와서 학생과 학부모들이 낯설고 예민한 게 사실이라면 학교에서는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학부모들끼리 안면이 생기게 학교에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학부모들이 따로 모임을 하는 게 저학년까지는 쉬운 일이지만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 학부모들도 시간을 내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점점 더 사적으로 연락하고 만나는 게 드문 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학부모들 사이에 연결점
-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사대주의(事大主義) - “민(閔)중전(中殿)을 잡아내라!” 왕이나 민비는 폭동 군중들이 그렇게도 벼락같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수문장이나 무예별감은 폭동군중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 박춘명의 소설 『임오군란』의 한 장면이다. 김주영의 『객주』는 군란의 시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식량을 급료로 받아든 군병들은 경악했다. - 이 곡식 자루를 한번 들여다보게. 곡식 자루에서 뜬내는 안 나고 갯내와 먼짓내 뿐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끼니가 되겠는가? - 정부재정은 민씨 일파의 손에 있었고 세도가(勢道家) 민겸호는 이에 대한 전권을 발동하고 있었다. 쌀로 세금을 내는 미납(米納)제도이기에 군병들의 급료도 쌀로 내주게 되어 있었는데 정부재정 부족을 이유로 급료 지불은 무려 10개월이나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는 솟구치는 군병들의 불만을 누를 수 없어 내어준 배급쌀은 대부분 폐미(廢米)에 다를 바 없었고 모래도 섞여 양과 무게를 속인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들 군병의 분노는 어찌 되었겠는가? 안국동의 민겸호 집이 이들에게 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