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와 법의 기만 “정치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표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받고 돈은 부자들에게 받는다. 그러고는 둘 다 보호하겠다고 말하지만 정작은 누구 편인지 분명하다.” 미국의 진보적 정치학자 마이클 패런티(Micahel Parenti)의 경고다. 그가 쓴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Democracy for the Few)』에서 한 말이다. 미국 정치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기만(deceit)과 부패(corruption) 그리고 약탈(plunder)’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20년 전, 이 주장은 정치에 대한 과도한 비판과 비관이 담겨진 것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자본이 지배하는 정치의 모순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되면서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고 부자들을 위한 국가 시스템이 시민의 정치기본권을 법과 제도로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은 근대 민주주의의 혁명적 성과이나 현실은 ‘큰 범죄에 형벌이 아예 없거나 또는 작든지, 그리고 작은 범죄에 큰 형벌’이 내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은 멀쩡하면서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석해서 감옥에 갇히더라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반장선거에 나섰다. 그런데 그 아이는 투표 때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상대편 경쟁자 이름을 적어낸 탓으로 지고 말았다. 왜 그랬냐면 두 아이는 원래 사이가 좋아 투표 때 서로 상대방 이름을 적어내자는 약속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상대방 아이는 그것을 어기고 본인 이름을 써낸 탓으로 당선이 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선거와 표(票)에는 패자는 없고 승자의 느끼한 웃음만 있다. 또 그렇게 약속을 어기고 이기고 보자는 자들이 우등생도 되고 학생회장이 되어 일류대학을 진학해서 고시에 합격하여 고속 승진을 하며 거들먹거리며 살았다.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국어 실력이 밑 힘이요. 인문학이 인생 공부의 기본이라고 한들 먹혀들겠는가. 정채봉의 ‘두꺼비와 개구리’라는 글이 떠오른다. 두꺼비와 개구리가 논두렁길을 가고 있었다. 개구리가 엉금엉금 기는 두꺼비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느리게 기어서 언제 양지바른 언덕에 도착하니?’ 두꺼비가 숨을 가쁘게 쉬는 개구리를 향해 대꾸했다. ‘그렇게 빨리 가서 뭐 할 거지?’ 개구리가 눈을 뒤룩거리며 대답한다. ‘그냥 빨리빨리 가는 거야, 가서 시간이 남아 누워
북경 동계올림픽이 한창이다. 빙상 쇼트트랙 경기에서의 석연치 않은 판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도 있었지만 올림픽 무대에서 그동안 연마한 기량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선수들의 활약상을 보면서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암울한 기분을 한때나마 날려 보낼 수 있어 좋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우리 선수단의 선전과 함께 북한 선수단 참여와 북한 고위인사들의 특사 방한이 이루어져 남북관계 차원에서 많은 기대와 희망을 주는 계기가 되었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비정치적인 스포츠 제전의 영역을 넘어 남북관계라는 정치 군사적인 영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올림픽 이후 남북간, 미북간, 북중간, 북러간 정상회담이 연이어 진행되면서 남북관계에 있어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지속되어온 북한 핵문제라는 장애물을 넘지 못해 남북관계는 2018년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상징되듯이 다시 한번 교착되어 있다. 2022년 북경 동계올림픽은 4년 전 평창에서처럼 남북미중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북한의 경직된 자세로 인해 갈등과 충돌 가능성의 하향 국면에 빠진 한반도 정세를 대화와 협력, 안정과…
헝겊(巾·수건 건)을 막대기로 치면(攵 또는 攴·칠 복) 너덜너덜해진다. 천 조각과 먼지 날리는 모양, 막대기의 그림이 敝(해질 폐)다. 그 헝겊을 두 손으로 들면(廾·받들 공), 폐단(弊端) 적폐(積弊)의 弊다. 그 敝를 헝겊(巾) 위에 올리면, 폐백(幣帛) 화폐(貨幣·돈)의 幣다. 사람 인(人)에 다른 그림이 붙어 굴복할 복(伏)이 되고, 어질 인(仁)도 되는 것처럼 문자(한자)는 그림에서 비롯해 그림의 합체나 변화로 여러 갈래 뜻을 짓는다. 뜻글자 표의문자(表意文字)다. 상(商)나라 때의 갑골문이 바탕이다. 그림을 간략하게 한 기호에 소릿값(발음)을 정하고, 영어의 알파벳 같은 기호로 인간의 여러 말(소리)을 적는 것은 소리글자 표음문자(表音文字)다. 발음기호 기능과 문화적 적립(積立)이 합쳐져 소통의 도구가 된다. 한글도 소리글자다. 이집트상형문자가 바탕이다. 폐단(弊端)은 나쁜 것이다. 폐백(幣帛)은 제사나 시댁에 올리는 음식이나 비단(帛)이니 좋은(좋아야 하는) 것이다. 발음 같은 ‘폐’의 두 뜻이 하늘과 땅의 차이(天壤之差 천양지차)처럼 크다. 그 차이가 ‘문화적 적립’ 중 하나다. 영어의 라틴어, 한국어의 한자어 역할 같은 것이다. ‘오래 쌓인
천성적인 소박함과 예지에서 오는 소박함이 있다. 이 둘 다 사랑과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대수방정식과 같다. 즉 가장 간단한 형태로 바꿈으로써 풀리는 것이다. 진실한 말은 언제나 꾸밈이 없고 단순하다. (마르실리우스) 가장 위대한 진리는 가장 간결하다. 어린아이와 동물이 지닌 매력은 바로 소박함에 있다.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조작한 차별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연은 신분이나 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자질을 부여한다. 자연스럽고 선량한 감정은 오히려 서민들 가운데서 더욱 많이 볼 수 있다. (레싱) 사람들이 교활하고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은, 우리를 속이거나 잘난척하기 위함이다. 그런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되며 흉내를 내서도 안 된다. 좋은 말은 언제나 간결하고 누구나 알기 쉬우며 논리적이다. 솔직함이란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부아스트) 솔직함은 언제나 고상한 감정에서 생긴다. (달랑베르)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너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네가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진실이 되도록 말하는데 힘써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직선로가 열려야 한다. 하느님
홀로 바다에 맞서 그는 이기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기술·경영혁신 능력이 우수한 중소기업 중 벤처확인유형(벤처투자, 연구개발, 혁신성장)별 요건을 갖춘 기업을 벤처기업이라 한다. 1997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된 이후 창업 열풍, 투자 활성화, 벤처 성공사례 등에 힘입어 2021년 말 현재 38,319개의 벤처기업이 활동 중이다. ’21.12월 말 현재, 벤처확인기업 현황을 보면 보증·대출이 52.7%로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혁신성장이 24.8%, 연구개발 11.6%, 벤처투자가 10.5%를 보이고 있다. 지역별로는 수도권 소재 벤처기업이 62.1%(2만 3794개)를 차지하고 있다. 업력별로는 초기창업기업(3년 미만)이 16.7%, 창업기업(7년 미만)이 절반을 차지(49.4%)하고 있으며, 업종별로는 제조업 62.1%, 정보처리 S/W 19.9%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벤처기업은 ‘15년 3만 개 확인 이후 증가세가 지속해 왔으나 2020년 3만9511개로 최고치를 보인 후 ‘21년 3만 8319개사로 전년 대비 1200여 벤처기업이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소셜벤처는 혁신적인 기술이나 비즈니스모델(BM)로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통합적으로 창출해 가는 기업을 말하며, 2021년…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정월에 뜨는 저 달은 새 희망을 주는 달, 정월대보름은 둥근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보름달을 보며 한 해의 농사가 잘되기를 소원하며 조상들은 이 날에 쥐불놀이, 풍물놀이, 윷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다. 태양을 이용해 만든 것이 양력이라면 달을 기준으로 만들었다하여 달력(曆)이다. 음력과 양력을 모두 명절이라 할 수 있으니 달이 해를 품든지, 해가 달을 품던지 지리적 환경에서 비롯된 력(歷)에 대한 인식이 그렇다. 음력설과 정월대보름을 즐기며 노는 풍경은 두만강을 넘어 조선족동네에 살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가족끼리 모여서 물밴새(만두)를 빚고 화토와 카드게임을 하며 밤새껏 며칠을 질리도록 논다. 0시 기준으로 폭죽소리가 요란하고 밤하늘은 환상의 색상으로 별천지가 된다. 놀이라야 마작을 주무르고 화토를 치고 술에 취하는 것이다. 남쪽에서의 음력설은 폭죽소리는 없어도 가족이 모여 명절을 즐긴다. 소비할 음식을 사고, 밤새워 전을 부치고 제사를 지내는 주부들의 손길만 바쁘다. 그리고 선물을 준비하며 새해축하 문자를 보내고 도로에는 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북쪽 고향에서의 70~80년대에는 빗과 칫솔로 물감을 뿌려 종이에…
죽음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데도, 우리는 마치 죽음이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인간의 생명이 과연 죽음과 동시에 끝나는가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불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위는 이성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는가, 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만약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속의 무엇이 불멸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속에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 멸하는 것보다 멸하지 않는 것에 대해 더 많이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그것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스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의 온갖 고통이 선을 낳지 않는다면, 세상은 두려움 그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사악한
며칠 전 내 아이가 엄마는 장애인들의 출근길 기습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질문에 짜증 섞인 느낌이었다. 그 순간, 파노라마처럼 함께 했던 장애 친구들의 비통한 일상이 떠올랐다. 청년 시절 장애인 야학에서 활동한 덕분에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존재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달걀처럼 뼈가 쉽게 부서져 평생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는 친구, 매일 도뇨관을 삽입해 소변을 빼줘야 하는 친구, 스스로 몸을 뒤집을 수 없어 욕창을 걱정하는 친구, 외출을 할 때면 계단과 10cm 턱을 넘지 못해 단박에 갈 곳을 돌고 돌아서 가야하는 친구, 겨울 거리에서 두 시간 이상 추위에 떨며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려야 했던 친구 등 중증장애인이 내 친구들이었다. 세상에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존재하는 중증장애인의 곁을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당연한 일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타게 해달라며 휠체어로 거리를 점거하거나, 쇠사슬을 묶어 전철을 멈춰 세우는 장면은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 시위에는 생존의 문제와 함께 “인간의 존엄”이라는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2001년 오이도역, 2002년 발산역에서 장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