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가을로 기억한다. 목포 유달산 자락에 자리 잡은 ‘반야사’라는 절에 해 질 무렵부터 꽤나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절 정문에는 제법 그럴싸하게 “반야의 밤”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한 학생이 불량기 있게 보이는 옆 친구에게 나직이 물었다. “야, 오늘 목포에서 한 가닥 한다는 것들 이리 다 모이는갑다.” 친구는 짝다리를 건들거리며 침을 찍 내뱉었다. 한눈에 봐도 불교학생회 다닐 것 같지 않은 불량한 학생들이 절에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부회장 여학생은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사실 부회장은 “반야의 밤” 행사에 밴드 부르는 것을 반대했다. ‘아니 절에서 하는 학생들 행사에 웬 밴드란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키만 멀쩡하게 큰 회장은 고등학생 밴드 ‘윙스’를 행사에 초청했다. 드디어 ‘반야의 밤’ 행사가 시작됐다. 반야사 대웅전이 활짝 열렸고 무대는 대웅전 마루였다. 대웅전과 대웅전 앞마당에 학생들이 그득했다. 찬불가도 부르고 반야심경도 외우고 승무도 추고 타령도 했다. 아주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종교행사였다. 그러다 저녁이 깊어지고 드디어 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컬기타, 베이스기타, 건반, 드럼이…
이제 2021년이 채 100일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2021년을 보내는 지금 머릿속이 편안한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대장동 신도시 사건이 던져준 충격과 상실감은 우리가 아는 어떠한 형용사로도 표현한다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50억 원의 퇴직금을 두고 “주식과 코인을 하지 않고 성실히 번 돈”이라는 당당함은 많은 소시민의 성실함을 한순간 무능력으로 만들어 버렸다. 차라리 “엄마 빽도 능력”이라던 정유라의 당당함은 솔직하기라도 했다. 연말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기대라는 시기다. 우울함이 지배하는 연말만은 피하고자 2021년 희망의 순간을 찾아보았다. 지난 7월 5일 국회 본청에 있는 국회부의장실에 아기 울음소리가 울렸다. 기본소득당 용해인 의원이 59일 전 출산한 아이 박단과 함께 김상희 국회부의장을 찾은 것이었다. 용의원의 출산은 현역의원으로 임기 중 출산한 세 번째 사례지만 임기 중 출산한 여성 의원이 아이와 함께 여성 국회부의장을 예방한 것은 최초였다. 국회부의장이 여성이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지난 2020년 김상희 의원은 대한민국 최초 여성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행정부에서는 여성 대통령과 여성 총리가 배출된 바 있고, 사법부에서
노동은 선은 아니지만 선한 생활의 필수 조건이다. 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노동과 걸식과 도둑질이다. 만약 노동자의 몫이 적다면 그것은 거지와 도둑의 몫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 놀고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가혹한 노동을 하고 있다. 배불리 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굶주리고 있다. 게으른 자들이 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줄여주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노동을 덧붙이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치스러운 놀이는 모두 그런 것이다. 처음에 노예는 자신의 군주가 권력을 누린다는 사실에 불평하지 않고, 다만 군주의 폭정에 불평할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전태일)/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즈음 집단지성이란 말을 찾는 사람들이 드물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유행어였는데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국 사회의 큰 에너지로 작동한 집단지성이 왜 이렇게 쪼그라든 것일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집단지성은 SNS 환경에서 태어났다. 손에 쥔 개별화한 디지털 기기로 세상에 참여해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한 마셜 매클루언에 따르면 모바일이라는 새 미디어는 개인의 발견이다. 객체가 아닌 주체, 수동이 아닌 능동. 주체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걸러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집단지성은 사회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통해 간선이라는 과두 체제에 일대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오죽했으면 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집단지성을 대놓고 비난했을까? 송 대표가 언급한 속칭 '대깨문'은 어쨌거나 SNS에 기반한 집단지성의 한 흐름이다. 그만큼 정치권에 있어 집단지성은 눈엣가시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런데 이와 무관하게 집단지성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정치 논의가 활발해지기 마련인 대선 정국에서 새로운, 응집된 논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
‘몸 상해 일한 대가, 50억!’. 국민의힘 곽상도 의원 아들의 이 발언은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일해야 퇴직금을 50억이나 받을 수 있는지, 몸이 얼마나 상해야 50억이라는 위로금을 받는지, 우리는 매우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곽 의원은 문준용 씨에 대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근거로 대통령에 대해 저격을 일삼았다. 이제 와서 보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결국에 문준용 씨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아무런 귀책사유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검사출신 국회의원으로서의 경험과 지위를 이용한 곽 의원의 행동은 다른 곳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필자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도 곽 의원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다. 곽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 요구하는 무지막지한 자료 요청에 직원들은 퇴근을 하지 못했고 이어지는 고소로 인해 업무 담당자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업무담당자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경찰 조사로 인해 두려움을 호소하였고 심한 두통과 두근거리는 심장 등 심신 이상도 발병하였다. 당연히 경찰 조사 결과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무혐의가 결정되었지만 곽 의원의 집요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27일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에서 외벽을 청소하던 29세의 일용직 노동자가 추락했다. 49층 꼭대기에서 내려가며 청소를 시작해 15층 높이에서 줄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에게 외벽청소는 그날이 첫 출근일이었다. 처음 외벽을 타는 노동자가 외줄에 의지한 채 49층 꼭대기에서 허공으로 몸을 밀어낼 때 어떤 마음일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했을 것이다. 두려움을 밀쳐내고 첫발을 내딛기까지 그의 어깨 위에는 여러 이유가 켜켜이 쌓여져 있었을 것이다. 매달리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절박한 요구들이.. 신산한 일용직노동자의 삶에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보통사람은 내려다보기조차 살 떨리는 높이에서 그는 그렇게 매달렸고 짧았던 젊음을 마감했다. 우리는 한해 산재로 882명이 죽는 나라, 그중에 37%인 332명이 이처럼 작업 중 떨어져 세상을 떠나는 나라다(2020년 기준). 비슷한 또래의 90년생 청년 한 사람도 산재(?)를 당했다고 한다. 업무상 과부하로 어지럼증을 앓았다는데 회사는 6년 근무한 그에게 퇴직금(위로금?)으로 50억을 지불했다. 모두가 다 아는 곽상도 의원의 아들 곽병채 씨의 이야기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그 대가를 받았을…
진정한 행복은 결코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나날이 새롭게 완성으로 가는 길을 걷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을 배우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벗에게 편지를 써야 하는지 쓰지 말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음악은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켜는 것을 가르쳐주지만, 언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켜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직 이성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줄 수 있다. 우리에게 이성을 부여함으로써 신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우리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준 것이다. 지금과 같은 나를 창조한 신은 어쩌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에픽테토스야! 나는 네 보잘것 없는 육체와 초라한 운명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서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나는 너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는 대신, 네 속에 나 자신의 신성의 일부분을 불어넣었다. 나는 너에게 선을 향해 나아가고 악을 피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나는 네 속에 자유로운 이성을 주
어린이놀이터 옆 정자나무 쉼터에 걸터앉아 어린이들 노는 모습을 본다. 손자 또래 아이들 대여섯 명이 콘크리트 의자에 가방을 얹어놓고 신나게 놀고 있다. 무슨 놀이인지 한 아이는 호루라기를 불고 다른 아이들은 도망을 치고 뒤를 쫓아가기도 한다. 검은색 반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한 사람 같이 토실토실 건강해 보인다. 사랑스러운 생명의 풋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조금 놀다 어디에서 다시 모이자고 했는지 썰물같이 사라져 갔다. 다른 어린이가 아빠 손을 잡고 등장한다. 아이는 그네를 타고 싶은데 잘 나가지 않는다. 앞으로 걸어갔다 뒤로 밀려오는 반동을 이용해 재밌게 타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빠가 다가간다. 아들을 그네에 앉히고 그넷줄을 꽉 잡게 하고서 밀어 높이 띄워준다. 아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한다. 아빠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사진을 아들에게 보여주며 함께 웃는다. 아빠의 환한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한동안 신나게 놀다가 아이는 아빠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 얼마 후 동생인 듯싶은 서현이가 엄마와 함께 나타났다. 엄마는 딸 서현이가 어린지라 눈 안에서 놀도록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넷줄을 손으로 잡는 법도 알려주고 서현이를 발판에 잘 앉히고 조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나오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이란 우화가 있어요. 바로 ‘장님(시각장애자)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죠. 옛날 인도의 어떤 왕이 장님들을 불러서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 보고 어떤지 말하라고 시켰답니다. 그러자 코끼리의 상아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무같이 생겼다”고 말하고, 귀를 만진 이는 “곡식을 까불 때 쓰는 키같이 생겼다”고 했어요. 다리를 만진 사람이 나서서 “다 틀렸다. 코끼리는 커다란 절굿공이같이 생겼다”고 우겼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굵은 밧줄처럼 생겼다”고 주장했죠. 정치권이 내년 3월로 예정된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끈 달아오르고 있네요. 주기적으로 인물을 놓고 견줘볼 수도 있고, 정책을 두고 따따부따도 할 수 있다는 건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 국민의 특권이죠. 선거철만 되면 이런저런 부정적인 평가나 불만이 쏟아지고, 지역과 혈연, 지연을 중심으로 갈등도 심화하므로 부아가 치밀 때도 없진 않아요. 그러나 어쨌든 권력을 잡겠다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생각과 말과 살아온 날들을 뜯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여야의 당내 경선이 치열한 작금의 정치권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짜증이 납니다. 후보들은 자기의 면모를 정직
1960년대 말 나의 고등학교 시절, 지금은 100세가 넘으셨음에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계신 김형석 교수님께서 10권으로 된 전집을 내셨다. 가난했던 시절, 아들이 그 전집을 사 달라는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큰 결단을 내리시던 내 아버님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잠을 잊은 채 밑줄을 그어가며 연거푸 두 번을 읽었던 기억. 아마도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은 김 교수님이라고 나는 지금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근래 그분의 현 정부에 대해 비판 기고문, 인터뷰 내용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도 같은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주위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아는 김 교수님은 그런 생각을 하실 분이 아닌데 혹시나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심이 사실이라면, 그분의 우리 사회에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냥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남북문제, 나아가 민족의 통일문제는 이념의 잣대를 버리고 희망적 사고가 아닌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바른 길이 보인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김 교수님께서 현 대북정책에 비판적이라는 전제하에 그분의 의식세계를 합리적으로 한번 추론해 보자. 수구초심(首丘初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