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대선 출마 선언에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앞으로 잘 준비해서 보여주겠다고 했다. 아니 중차대한 후보가 앞으로 무엇을, 언제 공부하고, 습득해서 국정에 차질 없이 대비하겠다는 것인지. 그래도 우리들의 언론은 칭찬과 미담 일색이다. 하긴 또 다른 야권의 대선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연일 설화에 올라도 지지도는 여전히 1위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들 야당의 유력 후보라는 인물들은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권의 공직자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언행에도 공통점이 있다. 노동시간이 일주일에 120시간 정도도 괜찮다는 발언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정식품도 선택할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는 발언이나, 집도 생필품이니 세금 낼 필요가 없다, 최저임금의 인상은 범죄행위라는 발언까지 한결같이 그 저변에는 국민은 언제나 시혜의 대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의 발언에서는 속 깊은 계급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다른 계급이므로 감히 올라올 생각을 말라는 우월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불가사의한 것은 이런 발언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이 사회이다.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는 무지의 극치를 이루는
- ‘에두아르트 보흘렌’의 유해 “나미비아”라는 아프리카 국가는 우리에게 낯설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어져 대서양으로 향해 있는 이 나라는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시절 독일이 지배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해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해안(Skeleton coast)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사막에 낡은 골조가 앙상하게 드러난 증기선 한 척이 유해(遺骸)처럼 파묻혀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바다에 있어야 할 배가 어찌해서 사막에 버려진 채 그렇게 있는 것일까? 이 증기선의 이름은 “에두아르트 보흘렌(Eduard Bohlen)”으로 1909년 이 해역에서 난파한 채 있다가 지난 100년 사이에 사막이 바다에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이런 난데없는 고고학적 풍경을 만든 것이다. 이 해안이 ‘해골’이라고 불린 까닭은 제국 독일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고 이에 저항하면 대량학살을 벌였기 때문이다. 에두아르트 보흘렌도 애초에는 화물을 실어나르다가 이후 노예선으로 그 기능이 바뀌었고 좌초 당시에도 원주민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던 중이었다. 제국주의 시대가 가한 폭력의 잔재가 사막에 폐가(廢家)와 같은 흔적을 남긴 셈이다. <기후전쟁(Climate Wars)>
대통령 지원자가 넘쳐난다. 줄잡아 20여 명이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8명의 후보가 나섰다. 예선을 거쳐 6명이 본선에 진출했다. 최종후보는 10월 10일 결정된다. 숨 막히는 레이스가 펼쳐지고 있다. 치열한 만큼 최악의 네거티브 당내 경선으로 치닫고 있다. 네거티브 선거전 강도만큼 야당의 어부지리 가능성은 높아진다. 세계일보는 4일 자 4면 기사에서 여당 경선을 ‘진흙탕의 개싸움’이라고 했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13명이 각축이다. 문 정부 권력기관 수장이었던 정치 신인들이 당내 지지도 1, 2위를 달리고 있다. 평생 보수 정당에서 정치를 했던 다른 후보들을 크게 앞서고 있다. 어떤 파란이 일지 모르지만 현 정부의 실정만 부각해도 제1야당 후보가 곧 차기 대통령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최종후보는 결정일은 11월 9일이다. 안철수로 대표되는 국민의당과 정의당을 비롯 대선출마 단골손님들도 선거가 임박할수록 존재감을 과시할 것이다. 후보들은 북적대지만 이들의 선거전략과 언론보도는 과거 관행, 그대로다. 유력 대선 후보군들은 언론인 출신들을 대거 영입해 우호적인 언론보도를 극대화하고, 경쟁후보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이다. 정책중심 보도가 정책경쟁을 이끈다.…
남북관계가 배타적 적대관계였던 80년대 전반기까지는 민족이익과 국익이 충돌하고 반비례하는 불행한 시기였다. 남북 간 정통성과 체제대결 속의 대립과 갈등은 국가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값비싼 민족이익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과 우리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제는 우리의 국력이 북한의 40배를 넘고 우리의 국방비가 북한의 GDP를 훨씬 뛰어넘는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남북관계도 배타적 적대관계에서 적대적 공존관계를 넘어, 이제는 협력적 공존관계를 지향하는 상황이다. 이제는 북한 핵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만 한다면 민족이익과 국가이익을 공히 증대시킬 수 있는 남북 경제 사회 공동체를 만들고 평화롭고 안전하게 남북 주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30년 가까이 끌어 온 북한 핵문제의 해결은 명의(名醫)가 정확한 진단을 통해 처방전을 내 오듯, 현재 한반도를 위요한 이해 당사국들의 핵문제 관련 국익을 객관적으로 단순화하여 판단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과감하게 추진한다면 해결 가능다고 본다. 아주 단순화해서 북한 핵문제 관련 이해 당사국의 핵심 국익을 살펴보자. 북한의 핵심적 국익은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공동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고독 속에 혼자 있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베르시에) 납과 같은 본성에서 황금같은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어떠한 정치적 연금술로도 불가능하다. (허버트 스펜서) 만약 사람들이 세계를 구원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고,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신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한다면, 그들은 세계를 구하고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게르센) 사회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리고 둘 다 모든 사람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 하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획득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에게 저마다 제 나름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려고 한다. 전자는 국가의 권력을 인정하지만, 후자는 어떠한 권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는 국가의 전제를 요구하지만, 후자는 모든 계급의 절멸을 요구한다. 전자는 사회주의적 전쟁을 긍정하지만, 후자는 오직 사회주의의 평화적 방법만을 믿는다. 사회주의에는 이 두 가지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어린이의 사회주의, 다른 하나는 어른의 사회주의이다. 전자는 과거의 것이고 후자는 미래의 것이다. 따라서 전자는 후자에게 마땅히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일 년 가까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참고 살라고 하니 참았다. 그게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고 눈만 뜨면 전파하고 있어 인내하며 기다렸다. 인간이란 생명체로 살아오면서 자연에 대한 죄와 빚이 많아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한편 죄 닦음이라고 생각해두자고 마음 다스렸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렇듯 코로나 19에 발목이 묶여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끼리의 대여섯 명 정도는 만나도 된다고 했다. 서울에서 어렵게 다니러 온 아이들을 만났다. 맏손자부터 껴안아 주었다. 밤에는 종남산 아래 산장에서 방역수칙 지켜가며 식사를 했다. 사는 맛이 느껴졌다. 가족 사랑과 함께 사람 사는 게 이 모습이구나 싶었다. 마음 풍요롭고 가슴 밝아졌다. 보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이 이루어질 때 생활인의 기쁨이 있다는 상식을 실감했다. 아이들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자기 삶의 주거 공간으로 돌아갔다. 떠나는 아이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 녀석들을 한 해에 한 번 본다면 10년이면 열 번 만난다는 것이구나 싶었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일인용 침대 위로 꽉 찬 대자리가 깔
해박한 지식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양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으나, 무지를 어리석음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자신이 알고 있지 않으면서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어떤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거나, 또 매우 드문 일이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조금밖에 모르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다! (소로) 우리는 자주적으로 사색함으로써 불필요한 독서를 얼마나 많이 피할 수 있는지 모른다! 과연 독서와 학문은 같은 것일까? 어떤 사람은 도서 출판이 학문의 광범위한 보급에 공헌했을지는 몰라도, 학문의 질과 내용은 그것 때문에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는데,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다. 지나친 독서는 사색의 적이다. 내가 연구한 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는 바로 책을 가장 적게 읽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무엇을 사색할 것인가에만 매달리지 않고, 어떻게 사색할 것인가를 배운다며 그로 인해 생기는 많은 오해를 미리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리히텐베르크) 모르는 것
올챙이국수는 햇 강냉이(옥수수)로 만든 음식이다. 남쪽에서는 강원도에서 여름에 별미로 만들어 먹는다. 만드는 방법이 조금은 전통적이어서 북쪽의 어느 지방의 것이라 딱히 말할 수 없다. 강냉이가 많이 나는 평안도 음식이라고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도시에 살았던 사람은 이름도 생소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강냉이가 적게 나는 지역이라 할지라도 강냉이 올챙이국수를 맛깔스럽게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올챙이국수는 무더위가 절정인 바로 지금 먹는다. 강냉이 알을 물에 불렸다가 맷돌이나 기계에 곱게 갈아낸다. 그리고 채에 내리고 내려진 물을 가마에 넣고 끓인다. 색깔이 노랗게 될 때까지 끊이는데 되직하게 하면 묵이 되고 헐렁하게 해서 구멍이 숭숭 뚫린 틀에 넣어서 내리면 올챙이국수가 된다. 틀에 굳이 내리지 않고 바가지 같은데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담아도 알아서 술술 떨어지는데 모양이 꼭 올챙이 같아서 그렇게 부른다. 도토리로 만들기도 하는데 그러면 도토리 올챙이국수가 된다. 강냉이 올챙이국수는 옥수수가 적당히 여물어야 하고 당도가 높아야 맛있다. 차가운 물에 내린 올챙이국수에 간장 양념을 하거나 동치미나 나박김치 국물을 넣어 먹기도 한다. 올챙이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
최근 이사하면서 서재 한 구석에 박혀 있던 여러 권의 한국기자협회 취재수첩과 여러 장의 사진 뭉치를 발견했다. 신문기자로 일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는데 한 장의 사진이 강렬해 눈길을 멈췄다. 전두환 정권 초기 때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이 총을 든 군인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있는 모습. 특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겁에 질린 표정이 압권이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 여의도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던 삼청교육대 희생자들에게 제보를 받고 요즘 언론에서 걸핏하면 다는 '단독' 기사로 보도했던 것이었다. "노인들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제목으로. 전두환의 만행이 어디 한둘 이겠냐만 이 사진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일 터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다 최근 국민의힘당에 기습 입당한 윤석열 씨의 발언이 겹쳐졌다. "41%의 지지율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임기말에 40%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사진과 발언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윤석열 씨 발언의 뉘앙스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문대통령이 실정을 했는데 임기 말에 지지율이 유지되는 건 비정상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 그가 정권교체를 자주 부르짖기에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발언 이면에 자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은 자유이다. 어떤 사람이 불행하고 괴로워하고 신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군가의 혹은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지배할 수 있는 것만 지배한다. 그런데 완전히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을 보거든, 그는 자유롭지 않음을 알라. 즉 그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노예인 것이다. (에픽테토스) 내면의 자유가 없는 외면의 자유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설사 외적 폭력에 억압당하지 않더라도 무지, 죄악, 이기주의, 공포 때문에 자기 마음을 스스로 지배할 수 없다면, 외면의 자유가 내게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나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영역 속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 곧 오만, 분노, 게으름을 극복하고 인류의 행복을 위해 몸을 바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을 자유인이라고 부른다. (채닝)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너는 항상 신에게서 받은 것을 언제라도 신에게 돌려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너는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신의 의지에 어긋나는 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