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면, 깜깜하고 시린 사월 어느 밤이면, 소주 한 잔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밤바다로 향하는 아비가 있어. 아비의 손에는 까만 비닐 봉투가 들려있지. 철 지난 겨울 양말과 장갑과 내복이 들어있는 봉투 말이야. 바다는 그때의 바다나 지금의 바다나 다를 것 없어. 칠년이라는 세월에도 어김없이 침묵할 뿐이야. 어둠은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그리움만 하얀 띠가 되어 파도처럼 달려들지. 술을 비워도 아비는 취하지 않아. 취할 수 없어. 봉투를 풀어 시커먼 바닷물에 내복을 입히지. 양말을 신기고, 장갑을 끼어줘. - 추웠어? 아비는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밤을 지새워. 술도 목으로 넘어가질 않아. 술에서 바닷물에 흔들리는 해초 냄새가 나. 흔들리는 해초 이파리가 딸의 손가락 같아. 아빠, 안녕. 웃을 때 드러나는 덧니 같아. 교복에 붙은 이름표 같아. 이름표에 새겨진 이름 같아. 딸의 숨소리 같아. 아비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자식을 잃고도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이 죄인 같아서. 때만 되면 고파지는 배가 기가 막혀서. 이런 것도 아비라고 할 수 있을까. 토해내고 토해내도 밤바다는 말이 없어. 목이 쉬도록 불러도 대답이 없어. - 추웠어? 숨이 막혀서, 사월만 되면 잠
우리의 행위 자체는 우리에게 속해 있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이미 하늘에 속한 것이다. (프란체스코) 우리는 날품팔이꾼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일해서 그날의 품삯을 받도록 하라. (탈무드) 우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는 다른 사람이 평가한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네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존 러스킨)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높으면 높을수록, 또 우리가 노력한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적으면 적을수록, 성공할 확률도 더 높아진다. (존 러스킨) 인간의 행위 가운데, 결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것일수록 더 훌륭하고 더 가치가 높으며 더 위대한 일이다. (존 러스킨) 만일 네가 자신이 일한 결과를 직접 볼 수 있다면, 네가 한 것은 결국 하찮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라. 인간이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를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행위는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는 신의 사업을 행하면서 인간의 대가를 바라고 있다. 사람의 얼이란 것은 온갖 힘의 물둥지다. 모든 냇물이 흘러서는 물둥지에 고이고 또 고였다가는 흘러나서 여러 갈래의 냇물이 되듯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마지막에 한 번은 반드시 정신으로
20년 전에는 우산 없이 등교해서 비가 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비 사이로 뛰어가는 축지법을 쓰면 좋겠지만 그럴 능력은 없어서 그냥 맞고 갔다. 어둑어둑한 학교 정문에 학부모들이 우산을 들고 서 있다가 자신의 아이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아이들 틈에서 많던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나처럼 우산도 데리러 올 부모님도 없는 아이들만 남아 있게 되면 급하게 뛰어서 집으로 갔다. 요즘은 이런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우산을 대여해주는 사업을 벌이는 곳도 있고, 교실에 남아 있는 우산들이 4~5개씩은 있어서 담임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우산을 빌려준다. 없으면 옆 반에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아이 손에 우산을 들려서 보낸다. 그러니 아이가 비 맞는 걸 강력하게 원하지 않는 이상 혼자 추적추적 비를 맞으면서 집에 갈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봄비가 내렸던 며칠 전 일이다. 퇴근하려고 나가는 데 정문 앞에서 3~4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머리를 신발 주머니로 가린 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우산이 없어서 집에 못가나 싶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태권도…
지난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었는데, 신문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신뢰의 추락이 그것이다. 편파보도와 허위 선동으로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오랜 불신에 이어서 부수조작으로 더 큰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최근 드러난 대규모 부수조작은, 지금까지 구독의 대가로 자전거와 비데를 제공하고 나아가 현금 살포로 부수를 늘리는 수준을 넘어선다. 최근 방송 보도를 보니 조중동을 비롯한 자칭 우리나라 유수 신문사에서 발행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신문뭉치들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팔려 나간다는 것이다. 이제는 심지어 동남아시아로까지 폐지를 넘겨야 할 만큼 발행부수를 더 늘린 셈인가? kg당 5백원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신문의 유료부수를 조사하는 기관인 한국ABC공사가 집계한 각사의 유료부수는 정책광고를 수주하면서 정부로부터 받는 요금을 결정하는데, 이 자료 자체가 엉터리이다. 각 신문사가 자신의 부수를 크게 부풀려 허위보고를 하는데도 이에 대한 실사는 하지 않는다. 발행부수가 모두 유료부수인 것처럼 속여 ABC협회에 보고해도 당국에서 그 실태를 검사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 누가 순수 유료부수만을 보고할 것인가? 오죽하면 부수공사 사무국장을 지낸 사람이 이 같은 잘못된 관
부유한 지배계급과 가난한 피지배계급으로 나눠져 있는 세상이란 애초부터 잘못된 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황금만능주의의 결과 공정한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전쟁과 다름없는 생존경쟁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부유한 기업인은 말한다. “노동자가 굶어죽는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난 약속한 대로 임금을 다 지불했다. 그 이상 나더러 어떡하라는 말이냐?” 카인도 아우 아벨을 죽이고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야훼께서 물었을 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답했다. 공장주도 그렇게 말한다. “내가 형제인 노동자에게 약속한 임금을 다 치르지 않았다는 말이냐?” (칼라일) 인간은 땅 위에서 땅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존재이므로, 어떤 사람이 사는 땅을 다른 사람이 빼앗는 것은, 그 사람의 피와 살을 빼앗는 것과 같다. 땅의 약탈에서 생기는 사회제도는 덜 직접적이고 덜 노골적인 뿐, 과거의 노예제도보다 더욱 잔인하고 더욱 사람을 타락시키고 만다. (헨리 조지) 지금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온갖 편리한 물건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가? 설령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행복을 누리고 있다 치더라
파주 헤이리의 내 작업실을 찾아온 친구가 ‘기분이 울적하니 아무 생각 없이 들을 수 있는’ 풍악을 대령하라기에 경쾌한 월드뮤직 음반을 골라 들려줬다. 두 세곡 뒤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 가 나온다. 제목만으로 바로 후렴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맞다. 그 노래. ‘호세 마르티 생각하면 이 노래를 목록에서 빼야 하는 거 아니야?’ 역사교사답다. 밝은 노래에서 어두운 역사를 바로 잡아낸다. 말 나온 김에 질문했다. ‘체 게바라는 유명한데 체 게바라의 영웅이었던 호세 마르티는 왜 그렇게 안 알려졌을까?’ 민중시각 역사교육, 세계시민의식 부재 이상의 탁견을 청했던 내 진지한 질문을 무색하게 한 답변. ‘외모 차이 아닐까’ 진심인지 유머인지 아직 확인 못해봤다. 호세 마르티는 몰라도 관타나메라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국정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마리카스같은 전통 남미 악기를 흔들며 노래하는 모습으로 방송도 많이 탔다. 노랫말을 모르고 들으면 리듬이 경쾌하고 중독성 있어 ‘휴가지에서 들으면 딱 좋을 노래’ 정도로 느껴진다. 제목 ‘관타나메라’도 ‘관타나모에 사는 여인’이란 뜻이니 가볍다. 그러나 스페인어 가사를 번역해 들여다보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가 화제다. ‘친절한 인간이 살아남는다’(한겨레), ‘인간은 이타적 존재, 성악설은 틀렸다’(중앙 SUNDAY), ‘이기심이 인간 본성? 그것은 잘못된 통념’(조선일보) 등 거의 모든 매체들이 넓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다윈의 진화론, 도킨스(R.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 등 그동안 생물학 분야에서 밝혀진 과학적 이론들은 성악설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들을 그 ‘과학적 증거’라며 제시하고 있다. 이제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론을 전면 수정해야 하게 되었다. 언론의 상찬이 자자하므로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경계해야 할 점을 지적해보기로 하겠다. 처음 사례로 든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을 보자. 사고로 무인도에 고립돼 살게 된 아이들이 그곳에서 지내면서 포악해지는 과정을 묘사한 소설이다. 10세 전후 초등학생 나이의 아이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악한 심성을 부각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의도였다. 그에 비해 브레흐만(R. Bregman)이 현실에서 찾아낸 증거로서 이타섬에 표류한 6명의 아이들은 13~16세 사이의 사회성을 익히
박원순 시장의 3선 당시 서울시 전체가 파랗던 것과 달리 이번에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여당의 완전 실패다. 지난 해 4월 21대 총선에서 개정선거법에 의한 비례위성정당의 의도를 막고 사회개혁을 위해 거대 여당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던 더불어시민당의 당대표였던 입장에서 매우 깊은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촛불혁명에 의한 현 정부의 개혁 시도는 집권 초기 다수 야당의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에 촛불시민은 기득권 구조개편의 사회개혁을 당청이 함께 추동할 수 있도록 180석에 가까운 여당 탄생에 기여했다. 하지만 1년 후 맞이한 이번 선거 결과는 시끄럽고 지리한 개혁과 희망없는 민생에 지친 시민의 분노를 보여준다. 지난 1년 사이에 사회는 어느 지점에선가 사회개혁 동력을 잃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개혁은 개선이나 개량과 다르다. 개선은 기존 질서를 존중하며 이성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개혁은 뜨거운 열정으로 기존 질서를 뒤엎어 새로운 판을 만든다. 기득권의 반발이 없을 수 없다. 개혁이 시간을 끌어 기득권의 조직된 저항이 생겨 시끄럽게 되면서 지체되면, 사람들은 피로감 속에 지치면서 그런 상황을 일으킨 개혁 주체에 부정적 감정을 갖게 된다. 그동안 검찰 개혁
위대한 지성도 도덕적 감정이 따르지 않으면 커다란 불행의 원인이 된다. (러스킨) 이성과 지적인 능력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지적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이성이 결핍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적 능력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세속적인 조건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능력이지만, 이성은 우리의 영혼에 자신의 세계와 신의 관계를 스스로 계시하는 능력이다. 이성과 지적 능력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것이다. 이성은 지적 능력으로 인해 인간이 빠지는 유혹과 기만에서 인간을 해방한다. 그것이 이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이성은 유혹을 이기고 인간의 영혼의 본성인 사랑을 해방하여, 그 발현을 가능하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이성과 양심을 구별하여, 선한 일은 깊은 사고력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래 분리할 수 없는 영혼의 힘을 억지로 구별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불구로 만드는 짓이다. 선행에서 사상을 제거하면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사고력이 결여되면 우리가 양심이라고 일컫는 것도 망상과 과장과 악을 인정하는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자행되어 왔다. 사람들은 양심을 앞세우며 서로를 미워하며…
‘신문지 한류’가 한창이다. 지난 4월 8일 문화방송 보도에 따르면, 태국의 가구시장과 소품시장, 인도네시아 꽃시장, 파키스탄의 길거리 음식점 등 동남아 시장에서 조중동을 비롯한 한국 신문지가 ‘물건 포장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 신문지는 지난 2018년 1000톤, 2019년 4500톤에 이어 작년에는 무려 18,000톤이 수출되었다고 한다. 한국은 세계 5위의 펄프 수입국이다. 인쇄잉크도 상당 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신문용지는 나무를 죽이고, 폐기된 인쇄잉크는 환경을 훼손한다. 비싼 종이를 잉크로 ‘오염’시킨 후 원가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수출하고 있는 셈이다. 수출로 ‘활로’를 찾기 이전에는 주로 국내 계란농가에서 재활용되었다. '미디어 오늘' 등의 보도에 따르면 매일 120톤(약 40만부)이 넘는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새 신문’이 계란판으로 둔갑하고 있다. 얼마 전 문화부의 신문 부수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주류 신문의 부수 부풀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발행부수와 영향력을 과장하여 기업광고와 정부광고를 유치, 유지하는 데 혈안이다. 신문지의 무모한 과잉생산과 폐기는 엄청난 사회적 낭비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독초에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