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1일이면 성남시가 탄생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와도 같이 변해버린 성남의 도시 역사는 다른 도시와는 다른 탄생 배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3대 요소인 의식주(衣食住) 가운데 주거의 변화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시 승격 이전의 성남은 그저 평범한 농촌이고 산촌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광주대단지 사업이 발표된 후로 꿈속에서도 보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졌다. 옛날 속담에 새들도 집이 있다는데, ‘집도 절도 없는 거친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살아가야 하는 절박한 광경이 전개된 것이다. 그 이후로 성남 사람들은 스스로 잘 살기 위해 노력해 왔고, 억척같이 꿈을 키워오면서 지금의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었다. 성남의 옛 모습은 숯을 굽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생활을 하던 전형적인 산촌마을이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친구인 이달충(李達衷, 1309~1385)은 숯골(태평동)에 새로 집을 짓고 시를 남겼다. 고기는 강과 바다에서 놀고 새는 숲에 사나니 얕으면 옷을 걷고, 깊으면 벗고 건너면 되지. 돌 털고 이끼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샘 찾아 물을 움켜 가슴 속을 씻어내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허난설헌(1563~1589)의 시 ‘감우(感遇)’이다. 난설헌은 생애 자체가 난초 같았다.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난설헌의 묘가 있다. 이름은 초희(楚姬), 본관은 양천, 자는 경번(景樊)이다. 묘 옆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두 자녀의 무덤이 있고, 왼쪽으로는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의 누이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는데 안타깝게도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했다. 지월리는 설월(雪月), 경수(鏡水) 두 마을이 있는데, 경상도의 선비가 과거 보러 가던 중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내린 눈 위로 달빛이 비쳐 선경(仙境)처럼 아름다웠기에 이 마을을 ‘설월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수마을은 조선 선조 때에 이 마을에 낙향해서 살던 노은(老隱) 김정림(金正立)이 명경지수(明鏡止水)란 말에서 두 자를 따서 ‘경수’(鏡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이
행정동인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은 법정동인 고등동, 상적동, 둔전동을 관할하고 있으며, 인근에 있는 성남공군기지로 인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과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가 최근 신도시로 개발되었다. 고등동은 크게 고산동(高山洞)과 등자리(登子里)로 구분되며, 高자와 登자를 합성하여 고등동이 되었다. 고산동은 안말, 웃말, 길아래, 주막거리의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막거리는 ‘새술막’이라고도 하는데 6.25전쟁 때 하천 가에 피난민촌이 생기면서 고등동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고 이 때 술집이 새로 생겨서 생긴 이름이다. 6.25 당시 서울 강동구 상일동 일대와 대왕면 고등리 일대에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는데, 난민을 위한 구호양곡 2천 가마를 횡령 착복하는 사건이 적발되기도 하였다. 등자리의 지명 유래는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잇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덕수이씨 가문의 묘가 많은데 벼슬이 높아 석등이 세워진 마을이란 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등동의 이경민(李景閔, 1578~1652) 묘비는 꿈 이야기를 근거로 만들어진 거북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성남의 덕수이씨는 중종반정 공신 해풍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