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2시, 나(박세형, 1948~)의 아버지 박인환(1926~1956) 시인의 제70주기 추모식이 망우역사문화공원 내 묘역에서 열렸다. 인제군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중랑문화재단의 협력을 얻어 올해도 많은 추모객을 모신 가운데 뜻깊게 행사를 마무리했다. 나는 망우리의 추모식을 그저 의례적인 행사로 하고 싶지 않다. 해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기억에 남는 행사로 만들고 싶다. 재작년에는 부친(?)이 하늘에서 보내온 편지를 추모객에게 읽어드렸고, 작년에는 직접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올해는 노래 가사용으로 써 둔 시를 읽어드리고, 조운찬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박인환과 경향신문’이라는 짧은 특강도 진행했다. 유명한 시인은 되지 못했지만, 창의성만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 행사에 늘 참석하는 김영식 작가 역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번 달 신문에 부친에 관한 글을 쓴다기에 나는 부친과 관련된 일화를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인제군에서 태어난 부친(이하 ‘인환’)은 인제남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의 덕수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덕수초에는 이모부가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에 들어갔으나, 3학년 때 영화관 출입이
일제시대에는 3.1운동에 참가했고 신문 연재소설 '찔레꽃'과 '밀림'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작가, 해방 후에는 공창 폐지 등에 앞장선 여성 운동의 선구자, 그리고 기독교 교회 최초의 여성 장로, 예술원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역사는 나 김말봉(金末峰 1901~1961)을 수식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첫째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 둘째 남편의 전처소생 둘과 내가 낳은 세 자녀, 셋째 남편의 전처소생 셋과 내가 낳은 두 자녀, 이렇게 모두 11명의 자녀를 키워낸 어머니로서의 일생이 가장 힘들었고 또 보람도 가장 컸다. 나는 1901년 부산에서 딸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 시절 많은 부모가 그러했듯, 부모님은 아들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를 말봉(끝봉)이라 이름 짓고 사내 옷을 입혀 사내처럼 키웠다. 부산 일신여학교(동래여중고) 3학년을 수료하고 상경하여 정신여학교에 편입, 1918년 졸업하고 황해도 재령 명신여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다음 해 황해도의 3.1운동 때 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든 죄로 경찰의 고문을 받아 한쪽 귀가 먹어버렸다. 하와이로 시집간 언니의 도움으로 1920년 도쿄로 건너가 쇼에이(頌榮)고등여학교에 편입하고 1924년
海觀(해관) 오긍선 선생(1878~1963, 교육자 의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최초 한국인 교장을 역임하고 현대의학 도입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일생 동안 우리나라 의학 발전과 사회사업에 헌신하시다. (연보비) 나(오긍선)의 호 해관(海觀)은 인류를 생각하면서 온 세계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김영식 작가는 2008년 ‘신동아’에 ‘망우리별곡’을 연재하며, 망우리에 먼저 오신 지석영 선생(1855~1935)과 나를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양대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즉 1899년 설립된 관립(국립) 의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지석영 선생은 국립 서울의대의 초대 교장인 셈이고, 나는 사립의 대표적인 연세의대의 초대 (한국인) 교장이니, 지 선생과 나 두 사람만으로도 망우리는 의학계의 성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에 지 선생의 동상이 있듯,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 앞에는 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 101인-그와 나 사이를 걷다’(2023)이라는 책에서 덧붙이길, 망우리에 있는 경성의전 출신 경성제대부속병원의 유상규와 세브란스병원의 오한영(나의 장남), 이영준(나의 제자)이 1930년 창립된 조선의사
여기는 지석영 선생의 묘 입구다. 먼저 여기 연보비의 글을 읽어 보면 개화기 여러 분야의 선구자인 지석영 선생의 삶을 잘 요약해 놓았다. 松村(송촌) 지석영 선생(1855~1935 의학자. 국어학자) 우두 보급의 선구자이며 의학 교육자. 한글 전용을 제창함. 사회, 경제, 문화 각 영역에 걸쳐 선각자.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안심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 - ‘1880년 가족에게 우두를 접종하면서’ 나이 드신 분들은 초등학교 때 ‘불주사’를 맞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천연두 예방 백신이다. 송촌이 종두법을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하기 전, 천연두는 치사율이 30%를 넘나드는 무서운 전염병이었고, 다행히 나았다고 해도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았다. 90년대에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 맨 처음에 이런 말이 나왔다. “옛날에는 어린이들에게 호환, 마마, 전쟁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고 지금은 불법 비디오가…”라는 말. 호랑이가 어린아이를 자주 물어가 호환이라고 했고, 마마는 천연두를 뜻한다. 당시에는 치료법이라는 게 나라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은 무당굿을 하며 바이러스를 ‘손님’이나 ‘마마’라는 존칭으로 부르며 제발 물러가시라고 비는 것뿐이었다. 천연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