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후 2시, 나(박세형, 1948~)의 아버지 박인환(1926~1956) 시인의 제70주기 추모식이 망우역사문화공원 내 묘역에서 열렸다. 인제군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중랑문화재단의 협력을 얻어 올해도 많은 추모객을 모신 가운데 뜻깊게 행사를 마무리했다.
나는 망우리의 추모식을 그저 의례적인 행사로 하고 싶지 않다. 해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기억에 남는 행사로 만들고 싶다. 재작년에는 부친(?)이 하늘에서 보내온 편지를 추모객에게 읽어드렸고, 작년에는 직접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올해는 노래 가사용로 써 둔 시를 읽어드리고, 조운찬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박인환과 경향신문’이라는 짧은 특강도 진행했다. 유명한 시인은 되지 못했지만, 창의성만은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
행사에 늘 참석하는 김영식 작가 역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번 달 신문에 부친에 관한 글을 쓴다기에 나는 부친과 관련된 일화를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인제군에서 태어난 부친(이하 ‘인환’)은 인제남초등학교를 다니다 서울의 덕수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덕수초에는 이모부가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경성제일고보(경기중학)에 들어갔으나, 3학년 때 영화관 출입이 문제가 되어 학교를 중퇴했다.
하지만 나는 과연 영화관 출입이 퇴학까지 당할 이유였는지 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훗날 친척 어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영화관(경성부민관, 현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일본인 교사에게 붙잡힌 인환은 엉겁결에 교사를 때리고 도망쳤다는 것. 중학생 때 담배도 피우고 영화 때문에 퇴학까지 당했지만, 그런 기질은 훗날 문단에서 많은 친구를 끌어당기는 매력으로도 작용했다. 그만큼 영화광이었던 인환은 훗날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고, 영화 평론을 쓰며 영화평론가협회(1954)도 조직했다. 이 때문에 인제군이 매년 시상하는 박인환상에는 시와 문학평론뿐 아니라 영화평론도 포함되어 있다.
인환은 황해도의 명신중학을 거쳐 평양의전에 입학했다. 당연히 의사가 좋은 직업이고 징병도 피할 수 있었기에 부친의 권유로 들어갔던 것 같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인환은 곧바로 학교를 그만두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탑골공원 옆, 지금의 송해길 입구에 있는 이모부의 지물포 자리를 물려받아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열었다. 주로 문학예술 분야의 귀중한 양서와 일서를 팔았다. 책은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인환은 여기서 맺은 인연으로 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동인을 결성해 모더니즘 시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시인 개인이 아닌 집단적 동인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인환을 비롯한 이들의 활동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아내 이정숙도 이곳에서 만났다. 무더운 어느 여름날, 정숙은 이종사촌 언니 이석희(잡지사 기자)를 따라 마리서사에 들렀다. 책방 구석 칸막이 방에서 모시 적삼을 입고 부채질을 하던 인환은 벌떡 일어나 환한 미소로 맞이하였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인환은 175~6cm 정도였고, 정숙은 진명여고 농구선수 출신으로 170cm였다. 두 사람이 명동 거리를 걸어가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정숙의 부친은 전주 이씨 왕족으로, 동일은행 지점장을 거쳐 해방 후에는 이왕직(조선 황실 업무 기관) 회계과장을 지냈다. 딸만 둘을 두었는데, 정숙은 언니와 14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다. 뒤늦게 얻어 애지중지 키운 딸의 남편감으로 인환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동생 이순용(6대 내무부장관)이 장래 큰일을 할 만한 청년이라고 권유해 결혼을 승낙했다. 인환과 정숙은 1947년 덕수궁에서 서양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의 활발한 문단 활동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6.25 전쟁 때는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원래 주량이 적은 인환은 6·25 전쟁을 겪으며 술이 늘었던 것 같다.
1955년 유일한 시집 '선시집'을 출간하고 이제 크게 시인으로서 막 꽃을 활짝 피우는가 싶더니 다음 해 3월 시인 이상을 추모한다며 며칠 동안 이어진 폭음 끝에 3월 20일 집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망우리에 모시고 돌아온 다음 날, 비가 많이 내렸다. 마루에 앉아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아버지의 부재가 느껴졌다. ‘이제 아버지는 우리 옆에 없는 건가…’ 내 나이 9살 때였다.
망우리의 비석은 그해 추석날에 세워졌고 글씨는 송지영 선생이 썼다. 비문의 앞면은 다음과 같다.
詩人朴寅煥之墓(시인 박인환지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그의 詩 '세월이 가면'에서-
지금 인환은 가고 없지만, 그의 시, 그의 말은 우리 가슴에 남아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묘역에 잘 어울리는 비문이 아닐까 싶다.
노래로도 만들어진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즉흥적으로 인환이 쓴 시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가수 나애심 등이 불러서 널리 유행했다고 전해딘다. 나 역시 이에 관한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밤, 인환은 이진섭과 술에 취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귀가했다.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종이를 펼쳐놓고, 도레미 대신 1, 2, 3의 숫자악보를 써넣고 불러보고 다시 고치곤 했다. 떠오른 원곡을 다듬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나애심이 부른 노래가 원곡에 가깝고, 박인희의 노래는 좀 다르다.
인환은 음악도 좋아했다. 어느 날인가 집 마루에서 인환과 정숙이 함께 ‘라모나(Ramona)’를 부르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라모나'는 1928년 제작된 영화로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여배우 돌로레스 델 리오가 불렀고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말봉의 소설 '밀림'(1938.8.16.)에서도 “라모나…달고 슬프고, 그리고 한없이 고운 곡조가 어슴푸레 어두워 오는 다방을 훨씬 더 감상에 잠기게 한다.”라는 묘사가 있다. 인환과 정숙은 결혼 전에 함께 봤던 영화를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음악적 재능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나는 고교와 대학생 때 종교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며 지휘자도 맡아 세종문화회관 콘서트를 기획, 실행하기도 했다. 나의 막내딸은 클라리넷 전공으로 지금 미국 한인교회에서 목사 남편을 도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 여동생 세화는 크로마하프를, 남동생 세곤은 트롬본 연주를 취미로 하고 있다.
묘 입구 길가에는 1998년 중랑구청이 세운 연보비가 있다.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적혀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김영식 작가는 '목마와 숙녀'에서 ‘목마’는 옛날 왕족이나 귀족 무덤에 넣던 부장품을 의미한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그의 책 '망우역사문화공원 101인-그와 나 사이를 걷다'를 참조하기 바란다.
김 작가는 아마 가족 외로 부친의 묘를 가장 많이 찾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옛날 분으로는, 인환을 친동생처럼 아꼈던 소설가 이봉구 선생이 떠오른다. 그는 망우리를 자주 찾으며 단편 '선소리'를 썼고, 또 어떤 단편에서는 김수영 시인과 함께 광화문에서 망우리행 버스를 타고 오랜만에 인환의 묘를 찾아갔다가 찾지 못하고 내려와 아래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나는 대학 시절 명동의 선술집 은성에 가끔 들렀는데, 그곳에서 두 분을 뵌 적이 있다. 이봉구 선생에게서는 늘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김수영 선생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훗날 그분의 수필을 읽어보니 인환에 대한 악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아무리 시기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때 가까웠던 친구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생전에 “내가 광화문 집에서 밥을 백 번도 넘게 해 먹였는데…”라며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연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박영준 교수는 소설가로 아버지의 친구였는데, 내가 회사에 취직하겠다고 말하니 좀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나는 가족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부친에 대한 원망도 있어 문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몇몇 회사를 거쳐 마지막으로 현대건설에서 근무하며 중동의 바레인에서 자재부장으로 일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하던 어느 날, 나의 가슴에서 갑자기 시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시들을 모아 시집 '바람이 이렇게 다정하면'(1991)을 출간했다. 조병화 선생이 추천사를 써 주셨다. 시집이 나오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의 아내였던 내가 이제는 시인의 어미가 되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