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항거하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던 이들에게 수여(추서)하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그러나 독립유공자 중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전수하지 못한 훈장들이 경기도 지역에만 수백여 건에 달한다. 화성시문화재단(대표이사 김종대)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은 지난 15일 안성3·1운동기념관과 공동으로 화성지역 미전수 독립유공자 훈장전 ‘함께 기억하다’를 개최했다. 두 기관의 업무협약 3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이번 전시는 지난 3월 안성3·1운동기념관에서 전시했던 ‘경기도 지역 미전수 독립유공자 훈장’ 가운데 ‘화성지역 미전수 독립유공자 훈장’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의병으로 활약했던 김선여, 우성오, 유성구, 홍건 ▲서울3·1운동에 참여한 박광남 ▲당시 수원군 반월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박석진 ▲송산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임팔룡, 최춘보, 황칠성 ▲장안·우정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여근, 이봉구, 이영쇠 ▲발안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으로 순국한 강태성, 김씨, 김주업, 김흥복, 안관순, 안무순, 안종엽, 홍순진 ▲쿠바에서 광복군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이민 한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안옥희 등 총 21명의 독립유공자의 훈장증을 전시한다. 제암리3·1운동
경기남부보훈지청은 앞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 계기로 대통령표창에 추서된 고(故) 박치상 지사의 후손에게 독립유공자 표창을 전수했다고 25일 밝혔다. 경기남부보훈지청은 이날 고 박치상 지사의 자녀 박찬원 씨에게 독립유공자 표창을 전했다. 박치상(朴致相) 지사는 1932년 6월 4일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서 청년회원 70여 명과 소작권 이동 방지를 협의한 후, 동면 운암리와 백계리의 지주와 소작인들에게 소작권 이전의 부당함을 질책한 이후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행진 등을 하다 체포돼 벌금 20원을 받는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박용주 지청장은 “조국의 자주독립만을 생각하며 일생을 바치신 애국지사님들의 얼과 숭고한 뜻을 기린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독립유공자와 유족분들에 대한 예우에 최선을 다해 독립유공자의 공훈을 널리 알리고 나라사랑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겠다”고 부연했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1주기를 맞았다.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그의 나이 만 열여덟. 앞서 3월 1일 3·1운동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친구들과 서울 학생단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나기도 했다. 4월 1일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은 그해 5월 9일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그와 아우내 만세 주역들은 6월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으며, 이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다.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고 동료들을 격려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그렇게 조국의 자주독립을 외치면서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옥중 만세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8일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진 속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인해 콧방울이 주저앉고 퉁퉁 부은 얼굴로 수감번호 371번이 선명히 찍힌 수의를 입은 모습이다
◆안응칠 역사/안중근 글/독도글두레 옮김/독도도서관친구들/384쪽/값 1만8000원 “만약 인민이 없다면 국가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지금은 민족이 중심이 되는 세상인데, 무슨 까닭으로 유독 한국 민족만이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기고 앉아서 멸망을 기다린단 말이오?”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으로 1909년 12월 13일에 쓰기 시작해 1910년 3월 15일에 집필을 마쳤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어려서 안응칠로 불렸고, 해외생활을 하면서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1896년 16살에 김아려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고, 이듬해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갖게 됐다. 안중근은 27살이던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으고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이 과정에서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고, 평양에서는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이후 연해주로 가서 의병대열에 참가해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투쟁에 나섰다. 1909년, 안중근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고, 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