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는 인간과 인간과의 계약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좀더 확대해서 말하면 조직과 조직 간의 계약관계를 기초로 하여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조직과 조직, 혹은 인간과 조직이 계약관계를 지탱해 주는 것이 바로 ‘신뢰’라는 끈이다. ‘신뢰’는 말 그대로 굳게 믿고 의지한다는 말이다. 신뢰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며, 신뢰의 끈이 느슨해지거나 끊어지면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사회를 구성한 개인들의 인간관계도 모두 무너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개인이 조직으로부터, 조직이 그 구성원인 개인으로부터 신뢰를 얻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이 신뢰를 얻어 나가는 과정이란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위 사람들이나 조직들로부터 신뢰를 받으며 참된 자기의 삶을 일구어 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기도 한다.
우리와 함께 어우러지고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지탱해 주는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복잡한 현대 사회가 지닌 또 하나의 병폐라고도 할 수 있다. 불신은 우리의 가치관을 파괴할 수 있다.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관계에서는 그 어떠한 관계 형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다변화된 산업사회의 구조의 또 다른 면이라고 치부 할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인간을 불신하는 병폐를 나아 결국 인간 삶의 기본 덕목인 도덕과 양심이 파괴되고 깨 버리게 될 것이다.
사회를 지탱해 가는 여러 요인 중에는 법이 있고 상식이 있고 합리적인 사고를 비롯하여 다양한 제도적 여건들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식이 통하는 사회야 말로 가장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사회의 현상이라 생각하는 것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사회의 관습에 기준하기 때문이다.
사회악 중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범죄들을 파렴치범 혹은 추악한 범죄라고 일컫는 것도 도덕과 양심에 기인한 사회지탱을 바라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중에 우리 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어린이 유괴 살해 사건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그렇게 빈번하게 일어나지 않지만 그 범죄가 가정이나 사회에 주는 영향과 충격의 파장은 엄청난 파장을 주게 된다. 특히 유별(?)나게 자녀에게 관심과 희망을 갖는 우리의 부모들로서 자녀가 유괴 살해당했다는 것은 자신이 유괴 살해당한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일 수 있다. ‘억장이 무너진다’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유괴 살해 당시 자녀가 느꼈을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고통, 그리고 살아 있는 유족들이 평생지고 가야할 정신적 고통을 이겨나간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다 온 사회가 분노로 들끓는 일은 어떠한가. 오랜동안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홍역을 치른 다음에야 조금은 잠잠해지지만 언제 또 이런 일이 우리의 아이에게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몸서리를 칠 수가 있다.
사람이 공동생활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서로간의 약속이 뒤따르고 이 약속이 잘 이행이 되면 신뢰가 쌓이고 사회는 밝고 화평할 것이다.
반면 약속이 헌신짝처럼 여겨지고 소중한 생명을 경시한다면 공동체의 운명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강력한 법적수단이 필요하게 되고 법적강제력이 발동된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법적강제력의 힘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공동체 가운데 놓여진 법적인 힘은 그 구성원들 스스로가 지키려고 했을 때 그 효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성원 각자의 인격적 사고와 사회적 질서 가운데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 선행 되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성숙한 주인의식에 대하여 다시 한번 자각해 봐야 할 때다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