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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희칼럼] 신념 하나로 사는 ‘동아투위 사람들’

10·24 자유언론 실천 선언 동아투위 유신체제에 도전
세습권력 동아일보 응징을 사회진보 추동 소명 다해야

 

24일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가 33년 전 유신독재의 엄혹한 감시망을 뚫고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한 날이다. 동아투위는 당시의 동아일보 젊은 사원들이 유신체제와 맞서 싸우다 해직 당한 뒤 결성한 단체이다.

1974년 10월 24일은 공휴일이었다. 지금은 폐지된 ‘유엔의 날(UN Day)’이었다. 유엔은 남한에게는 아주 고마운 국제조직이다. 6·25 전쟁 때 군대를 파견해서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줬다. 남한 정부는 그 후 유엔에 단독 가입했다. 정부는 이날을 기념일로 정해서 대대적인 행사를 치렀고, 모든 관청은 휴무했다.

1974년 10월 당시 서울 세종로 139 동아일보 3층은 편집국 전용공간이었다. 기자들은 공휴일이면 출입처 대신 회사로 출근했다. 그래서 그날 오전 편집국엔 모처럼 기자들이 많이 모일 수 있었다. 더구나 전날 중앙정보부가 송건호(작고) 편집국장을 연행해 간 데 대해 기자들이 항의하며 철야농성을 벌이던 뒤끝이었다.

장윤환(문화부 기자)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은 미리 준비해온 유인물을 기자들에게 나눠줬다. 9시가 조금 지나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 ‘자유언론 실천선언’ 기자총회’의 개회를 선언하자 기자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180명이 넘었다(동아투위 발행 ‘자유언론’). 긴장이 감돌았다. 홍종민(작고·편집부 기자) 분회 총무가 선언문을 낭독했다.

<자유언론 실천선언>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중략>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중략>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떤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이날 발표된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장 같았다. 그러나 딱히 긴급조치 위반은 아니었다. 선언문은 ‘언론자유(The Freedom of Press)’가 아닌, ‘자유언론(The Free Press)’이라는 낯선 용어를 사용했다. 선언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자유언론은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닌, 천부적인 자유를 뜻하는데, 기자들은 이를 들고 나선 것이다. 당시는 언론자유도 ‘법에 의한 제한’이 가능했다.

또 하나는 ‘실천’이다. 그 무렵 ‘선언’은 곧잘 발표됐지만 치밀성과 의지의 부족으로 행동화에는 죄다 실패했었다. ‘동아투위’ 기자들은 희생을 각오하면서도 ‘실천선언’을 이행했다. 이 때문에 신문사는 광고탄압을 당했고, 마침내는 해직된 것이다. 투옥과 해직은 예상했지만 박정희와 사주 김상만이 그렇게 빨리 야합할 줄은 몰랐다.

이같은 미증유의 실천적 투쟁을 전개했던 그들은 누구였던가. 한 세대가 지난 오늘까지 남아 있는 동아투위 위원은 113명이다. 이 가운데 12명은 작고했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30~40대였고 30대가 주축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서울대 출신이 절반가량이다.

 

그 중에도 문리과대학(College of Liberal Arts & Sciences) 출신이 다수이다. 리버럴한 학풍을 체득한 집단이다. 이들은 1967년부터 70년 사이에 주로 입사했다. 이들은 술자리가 잦았고, 이심전심으로 모든 것을 합의했다. 그밖에 고려대, 연세대 출신 등이 있는데, 모두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4·19 학생운동을 겪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박정희 암살 동기에 대해 “젊은 기자들이 거리로 내쫓기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반년 만에 좌절당한 자유언론 실천투쟁은 역사를 바꾸는데 일조했고, 참여정부는 주인공들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숙원인 원상회복 문제는 모른 척 하고 있다. 다만, 후배 언론인들이 매년 이날 기념행사를 갖는다. ‘동아투위 사람들’은 이제 몸은 늙었지만, ‘세습권력 동아일보’는 응징당해야 마땅하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의 진보를 추동해야 한다는 언론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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