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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평통 인천-김포시 대표단 평양기행기

강경구 김포시장을 비롯, 민주평통김포시협의회 위원 등 김포시대표단은 지난 8일 안산수 인천시장 등 인천시대표단과 함께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북측의 조선카톨릭교협회와 평양시 체육단의 초청 등으로 이뤄진 이번 방북은 각 단체마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다.

 

김포시는 그동안 민주평통김포시협의회(회장 조진남)가 주축이 된 개성 연탄지원과 나무심기 등을 통해 조성한 신뢰를 바탕으로 시가 추진 중인 평화지대 구상을 실현키 위한 평양측 관계자와의 의사타진을 위해 방북에 동참케 됐다.

 

또한 인천시는 지난 3월 인천시와 평양시 축구단간의 친선경기를 추진하고 북측의 주경기장이 될 평양시체육단 축구장의 개·보수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합의한 후 인조잔디와 우레탄 트랙 설치 및 기술이전을 한달여에 걸쳐 실시하고 9일 준공식에 참석키 위해 방북단을 구성했다.

 

 

▲평양기행 첫째날
평양 방북… 김정일 장군 충성으로 가득

8일 약속된 시간보다 3시간 30분이 늦은 오후 1시 40분. 드디어 150명의 방북단을 태운 고려항공이 평양의 순안 비행장을 향해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8일 약속된 시간보다 3시간 30분이 늦은 오후 1시 40분. 드디어 150명의 방북단을 태운 고려항공이 평양의 순안 비행장을 향해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평양까지 오는 동안 고려항공의 여승무원들은 로동신문을 나눠줬다. 선군에 대한 내용과 농촌지역의 새마을 운동 등이 실려 있었으며 당과 김정일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꿈같은 날, 꿈같은 하늘을 날아 꿈처럼 조선의 수도 평양 순안비행장에 비행기가 안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일행이 조별로 버스에 오르자 3명의 북측 요원이 함께 동승했다. 이들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평양 체류기간 내내 줄곧 우리와 함께하며 다니며 무언의 감시를 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도로는 왕복 6차선으로 뻗어 있었으나 오가는 차량은 가뭄에 콩나듯 한두 대가 눈에 띠었다. 추수가 끝난 농촌 풍경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으나 여기저기 들판에 허리를 숙이고 나락을 줍는 초라한 행색의 인민들 모습에서 위대한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의 구호가 여지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만경대 소년 학생궁전에 도착하자 조별로 여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교육장을 둘러 봤다. 안내원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령도자의 커다란 관심과 세심한 지도에 의해 어린이들을 위한 과외 교양의 본보기로 꾸려졌다고 설명했다.

공연은 전통 국악, 국악과 관현악의 어울림, 독창, 합창, 민속공연 등으로 꾸며져 80여분동안 실시됐는데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기계적이었다. 예술에 앞서 안쓰러움과 연민이 솟았다.밖으로 나오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평양시내를 가로질러 버스는 숙소인 양각도 호텔로 향했다. 참으로 카메라에 담고 싶은 풍경과 모습이 많았지만 안내원들은 차에서의 촬영을 철저히 감시했고 꺼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해 만찬이 끝난 후 일행은 평양의 야경이라도 구경할 요량으로 47층의 바로 올라갔다. 대동강 맥주를 몇 병 시키고 안주로 낙지와 모듬과자를 주문했다. 낙지를 시켰는데 오징어포가 나왔다. 알아본 즉 남쪽에서 오징어로 부르는 것이 북쪽에서는 낙지였고 낙지라고 부르는 것이 오징어였다. 47층에서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저 멀리 주체탑의 붉은 불빛만이 깜빡일 뿐 평양은 어두운 침묵의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평양기행 둘째날
평양시 축구장 준공식 남북 청소년 축구 관람


9일 아침 평양에서의 1박을 하고 일행은 아침 6시부터 식사를 한 후 일정에 나섰다. 어제 하기로 계획됐던 만경대 김일성 생가를 둘러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했던 서해갑문을 돌아보고 평양시체육단축구장 준공행사와 남북 청소년 축구를 관람한 후 콩우유 공장을 둘러보는 것이 일정이었다.

만경대 전시실을 나와 김일성이 태어났다는 생가를 둘러보고 서해갑문으로 향했다.

서해갑문은 1981년에 공사를 시작해 1986년 5월에 완공한 남포시와 황해남도를 잇는 방조제 공사 현장을 말한다. 총 8㎞의 방조제를 막아 농경지 조성과 농업 및 공업용수를 확보하고 대동강의 홍수를 조절하기 위해 조성한 북한 최대의 역사적 자랑 거리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우리의 새만금을 둘러보고 올라간 기자로서는 서해갑문은 새만금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평양 시내로 돌아오면서 시내에서 보았던 고구마 상점을 이야기하며 군고마를 먹자고 했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으나 대신 북쪽의 고구마와 토종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평양시내로 돌아와 고려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후 인천시의 지원으로 준공식을 갖는 평양시체육단축구장으로 향했다.

일행은 운동장에서 간단한 준공식과 남측에서 준비한 축구화 및 유니폼 등을 전달하고 남북 청소년 축구 시합을 관람키 위해 5.1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준공식을 마치고 버스에 타자 따뜻한 군고구마가 실려 있었다. 그동안에 북측이 각 버스 마다 인원수에 따라 군고구마를 준비한 것이었다.

 

아쉽게도 남북 청소년 축구는 남측이 1대0으로 패했다. 그러나 일행은 이렇게 남북 청소년이 북한의 그라운드에서 친선경기를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고 즐거웠다. 일행은 운동장을 나와 북한의 장충성당과 평화 3000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콩우유 공장을 둘러본 후 호텔로 향했다.

 

 

▲평양기행 마지막날
박물관 전력 부족해 수많은 작품 어둠속 침묵


3일째 아침이 밝았다. 일행은 아침 8시에 호텔을 떠나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기념해 조성한 170m 높이의 주체탑과 개선문을 둘러 미술 박물관으로 향했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 논리를 자랑하는 그들인데 실제로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며 자유가 없는 독재국가가 돼 있는지 안타까웠다. ‘우리는 당이 결심하면 무엇이든 한다’는 구호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정말로 당이 무오류의 절대적 존재라고 믿는지 의심스러웠고 그동안의 실정으로 피폐한 인민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당은 왜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인민들의 노력 동원을 부추기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김일성 수령은 아직도 그들의 가슴에 살아 계시고 인민은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품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구호에서는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조선 미술사 박물관은 김홍도의 작품을 비롯한 보물들이 소장돼 있다는 설명에 한껏 기대를 품고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각 전시실은 고구려 벽화로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구분돼 있었으나 기가막힌 것은 그 화려한 그림이 전시된 박물관에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아 어떤 방은 그림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다.

 

 

 

그들은 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어찌 일국의 박물관이 형광등이 부족해 전기도 제대로 켜지 못할 정도로 관리되고 있는지 한심했다. 밖으로 나오자 때마침 길 건너에서 소학교 어린이들이 줄지어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여 순간적으로 촬영을 했으나 이내 안내원의 제지로 더 이상 찍을 수가 없었다.

 

2박3일의 평양 체류를 마치고 떠나면서 새삼 사람이 어느 곳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말이 실감났다. 김포공항이 가까워지자 화려한 불빛이 내려다 보였다.

 

평양의 어두운 밤과 비교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지난 3일간 보았던 가난과 어둠과 수령과 장군의 나라 북한이 하루빨리 천지개벽하여 함께 손잡고 진정한 인민의 나라 진정한 자유의 땅이 되기를 기원했다.

또한 그들이 우리와 한 민족임을, 보듬고 살아야할 한 형제임을 생각하며 남과 북이 평화와 화해 속에서 통일의 날을 앞당길 수 있도록 남쪽의 지원이 계속돼야 함을 생각했다.

평양, 그곳에는 우리와 피를 나눈 가난한 형제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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